나의 진심은 무엇일까? 너의 정말은 진짜로 정말일까?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정말이다.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정말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정말 예쁘다고 감탄한다.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강조하고 싶을 때, 믿어달라고 호소할 때, 나는 정말에 악센트를 넣어 말했다.

정말 진심이야. 믿어 줘.”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구할 때도 썼다.

정말 잘못했어. 미안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을 넣으면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해가 이해로 바뀌기도 했다. 쉽게 용서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말이라는 말을 남발할수록 점점 나의 진심이 뭔지 모르게 되었다. ‘정말이 없었다면 나의 진심을 살피는 데 더 애를 썼을지도 모른다. 이해받고 용서받고 믿음을 얻기 전에 나의 언행을 바르게 다잡는 일에 마음을 쓰고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진심이란 말도 홀로 세워놓고 보면 초라해 보인다. 무수한 친절과 예의로 치장된 관계의 말들 속에서 어느 마음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잘 분간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음은 너무 드러내도 문제고 너무 안 드러내도 문제다.

 

그래서 진심은 참 까다롭다. 나는 진심이 겉으로 드러난 정황 혹은 정도를 가리켜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이나 식당이나 물건에 신뢰와 호감을 갖게 된다.

 

진정성의 농도, 진심이 느껴지는 정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즉 진심은 일종의 자본이다.

 

진심의 핵심, 진정성의 요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양적으로 사용하면 진정성이 된다.

 

곰탕집이 있다. 뼈를 전기솥에 넣고 서너 시간 고아 맛을 낸 곰탕집이 있고, 꼬박 하루 동안 장작불로 고아 맛을 낸 곰탕집이 있다고 하자. 재료가 똑같다면 이 곰탕에 투여된 시간의 차이가 진정성의 농도일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 않는 사람과 바쁘더라도 흔쾌히 시간을 내주는 사람의 차이가 관계의 진정성을 가른다. 시간이야말로 확실한 진심의 지표다.

 

오늘 생을 마감하는 사람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전 재산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가치를 지닌다. 우리 모두는 시간 앞에서 유한한 존재들이다. 내가 가진 시간의 양이 목숨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고 있다는 말은 내 목숨의 일부를 내주고 있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내 목숨이 사용된다.

 

그래서 인생에서 시간은 어느 것에 더 목숨을 소비하고 사용했느냐의 결과를 말한다.

 

나는 미워하는 시간보다 사랑하는 시간을, 잊으려 하는 시간보다 그리워하는 시간을 더 늘리려고 한다. 나를 위한 유익과 즐거움을 구매하는 데 내 목숨을 지불하려고 한다.

 

나는 자주 나에게 타이른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목숨을 분산하지 마라.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주어라.

 

그렇게 진실해지고 깊어지기를 원해라. 그래야 목숨이 흩어지징지 않고 집약되고 축적된다. 그 집약과 축적의 관계를 사람들은 막역한 사이라거나 베스트 프렌드라거나 단짝이라거나 삼총사 등과 같은 말로 부른다.

 

정말은 정말일 때만 쓸 수 있다. 정말은 진심일 때만 쓸 수 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에게 일 순위로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분산되지 않는 목숨의 몰입이 있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그에게 시간을 쓰고 있다면 그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나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마음만큼 진짜가 없고, 그 시간만큼 정말인 것은 없다. 시간이 진심이다.

 

--림태주의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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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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