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치열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무엇이든 수치화, 계량화해서 비교당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어려서부터 잠재력은 IQ와 EQ로 수치화됐고, 학습 능력은 시험 점수로 대치되었다. 성적이 좋거나 운동을 잘하면 칭찬과 특별 대우를 받았지만, 뭐든 그저 그런 수준이면 존재감 없는 학생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성취의 기준이 ‘나’보다는 타인과 세상이 되기 일쑤였다. 남들이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회사에 가면 누구보다 훌륭한 직장인인데, 주말만 되면 씻지도 않고 폐인이 되어 폭식을 일삼는 사람들도 많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자신을 내몰며 치열하게 일하지만, 홀로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우울과 무기력이 마치 보이지 않는 이슬비처럼 마음을 차갑게 적신다.
그러면서 스스로 묻는다.
‘아! 남들 눈에 맞추어 사느라 너무 피곤하다. 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일 뿐, 사람은 태생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나’라는 자기 개념은 출생과 더불어 부단히 형성되어 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개념은 절대 혼자서는 만들어 갈 수 없다. 마치 일상생활에서 거울이 없다면 내 모습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처럼, 나를 향해 누군가가 제공해 주는 ‘거울 반응(mirroring)’을 통해 비로소 ‘나’라는 자아 개념이 만들어진다.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받는 칭찬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는 동력 중 하나다. 그러니 인정받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다면, 그 노력의 가치를 깎아내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애쓴 자신을 충분히 지지해 주어야 마땅하다.
-감정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격하게 튀어 나오는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사그라듭니다. 반대로 자꾸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판단할수록 감정은 날개를 단 듯 더욱 활개를 칩니다. 감정이 부정적인 생각을 줄줄이 끌고 오는 것이지요,
‘이런 일로 화를 내다니, 나는 너무 나약해’라거나 ‘저따위로 행동하다니, 저 사람 나를 무시하나?’ 같은 것들이 감정에 날개를 달아주는 생각입니다.
‘아, 내가 화가 났네’하고 담백하게 대응해 보세요. 그러면 소용돌이치던 감정도 차차 잦아들면서 알아서 멈춥니다.
둘째,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따로 구분하지 마세요.
-감각의 동물인 우리가 유쾌와 불쾌를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특정 감정을 묶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일은 단순히 감각의 영역에 국한되어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판단이 개입하지요. 그리고 판단은 대체로 편견에 의해 죄우됩니다. 우리는 주로 교육받은 내용과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들어 감정을 구분합니다. 그 근거가 자기 경험에 한정되어 있음에도 한 번 편견이 자리 잡히면 사람은 그에 부합하는 증거만 모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편견에 근거해서 감정을 판단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감정에 대해서는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지 마세요. 감정은 에너지이고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감정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집착은 결국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감추는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셋째, 감정이 드는 순간 알아차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감정이 판단으로 연결되는 과정은 매우 자동적이어서, 그 고리를 끊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끊기는커녕 약화시키는 것조차 힘들지요. 그래서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먼저 감정이 드는 순간 알아채야 합니다. 그래야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지요. 그러려면 ‘감정을 느끼는 나’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그것을 ‘관찰하는 나’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마음챙김에서 명상을 권유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명상을 할수록 ‘관찰하는 나’의 힘이 세져서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먼저 그것을 살피게 되고 즉각 반응하기 전에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감정, 어느 때는 내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내 것이 아닌 듯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자니 의도치 않게 불쾌한 감정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의 노예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요.
감정을 주체적으로 잘 조절할수록 인생을 더욱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아무리 화가 나는 순간에도 그 분노의 주인은 나 자신입니다.
누구나 홀로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일 때면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속 목소리가 들려온다. 외부로만 치닫지 말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를 봐달라는 음성이다.
심리학자 앤서니 스토는 우리의 인생은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이 늘 함께한다고 말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을 통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이다.
삶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충동 모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욕망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것 같다.
사회생활은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나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없이 바쁘게 사회생활에만 몰두하면 우리 마음은 금방 고갈되어 버린다.
우리 안에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면 세계가 있다. 내가 그것을 돌보지 읺으면 그것은 버려진 논밭처럼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쉼 없이 바쁘게 살다가도 어느 날 문득 휴식을 바라게 된다. ‘바쁜 일만 끝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지. 그동안 못 본 드라마도 몰아서 볼 거야. 쌓아 둔 책도 읽어야지.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빈둥거릴 거야.’
누구나 때때로 이런 다짐을 한다. 홀로 있음으로써 분주한 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면 즐거운 마음도 잠시, 익숙한 불안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동안 미뤄 온 영어 공부도 해야 할 것 같고, 운동도 시작해야 할 것 같고, 학원도 다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다이어리를 꺼내 시간을 쪼개고, 계획을 세우고,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하다못해 스마트폰을 꺼내 뉴스를 검색하고 쇼핑을 한다.
이처럼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갈구하지만 혼자 있는 법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막상 혼자 있게 되면 그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혼자 있는 동안에도 나 자신을 만나려 하기보다 또다시 무언가를 하려 든다.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고독이나 외로움과 연결시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교의 종교철학자 폴 틸리히에 따르면 외로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혼자 있는 고통이 론리니스(loneliness)라면 혼자 있는 즐거움은 솔리튜드(solitude)다. 둘 다 고독이라고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솔리튜드란 혼자 있는 시간에 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내적 공간을 적극적으로 가꾸어, 보다 창조적인 상태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은 자아(Ego) 능력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은 관계를 맺는 능력만큼이나 성숙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또 혼자임을 수용하는 태도는 타인과의 관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강화한다. 혼자임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진정 자기 자신과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만이 타인을 파괴하지 않고 질식시키지 않은 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