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 작품

#장르 :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브래드 피트/케이트 블란쳇/틸다 스윈튼/줄리아 오먼드 등...

 

♣스포일러 있어요~^^

 

“1985년 4월 4일 뉴올리언스. 이게 나의 마지막 유언이다. 남길 게 별로 없다. 재산도 없고 이 세상에 왔을 때처럼 빈손으로 떠난다. 나의 특별한 삶을 아직 기억이 날 때 적어둔다. 내 이름은 벤자민 버튼. 난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 1차 대전이 끝나 모두가 축제에 휩싸인 기쁜 밤이었지. 날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 (벤자민 버튼)

 

벤자민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벤자민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남편에게 아들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 아들의 외모를 확인한 아버지는 경악하면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어느 양로원 계단에 버렸다.

 

“아무리 흉측해도 너도 주님의 자식이야." (퀴니)

양로원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 퀴니는 측은지심으로 아기를 데려와 의사에게 진찰을 맡겼다.

“백내장이라 앞을 거의 못 보고, 듣지도 못할 거야. 관절염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피부는 탄력이 없고 손발은 경직됐어. 갓 태어난 아기지만 몸은 죽음을 앞둔 80대 노인과 다를 게 없어.” (의사)

“죽어가요?” (퀴니)

“살아보지도 못하고 세상 하직하는 거지. 누구야?” (의사)

퀴니는 순발력 있게 둘러댔다.

“언니가 백인 유부남과 눈 맞아서 낳았는데 천벌을 받은 건지 흰 피부를 가졌어요.” (퀴니)

“버려진 아기들을 돌봐주는 곳이 있어. 여기선 못 키워. 재단 지원이 줄어서 근근이 버티는 상황인데 아기까지......” (의사)

“죽는다면서요...” (퀴니)

“죽는 게 이 아이의 운명이야.” (의사)

“아뇨. 이 아기는 기적이에요. 좀 달라 보일 뿐이죠.” (퀴니)

 

퀴니는 아기를 기꺼이 양로원 새 식구로 맞아들였고, 이름을 벤자민으로 지어주었다. 퀴니는 벤자민을 양로원에 거주 중인 노인들에게 소개했다.

“건강하지 않으니까 잘 보살펴줘야 돼요. 빨리 늙는 병에 걸려 오래 못 살거래요.” (퀴니)

“우리랑 똑같네.” (노인들)

 

퀴니의 연인이자, 양로원에서 요리 담당인 티지는 반대했다.

“정신 나갔어? 당신이 불임이라 아기 못 갖는 건 알지만 이 아기를 키우는 건 안 돼. 괴물이잖아.” (티지)

“제발...운명은 아무도 몰라.”(퀴니)

 

벤자민은 그렇게 양로원에서 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퀴니를 엄마로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기가 아닌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인 줄도 알았다.

 

“엄마. 내가 점점 변해가는 것 같아.” (벤자민)

“딴 사람들도 다 변해. 넌 좀 다르지만. 삶의 종착역은 다 같아. 어떤 길로 가는지가 다를 뿐이지. 넌 네 길을 가는 거야.” (퀴니)

“엄마, 난 얼마나 더 살아?” (벤자민)

“아직 살아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원래는 오래 못 산댔어.” (퀴니)

 

노인들이 가득한 양로원에서 죽음은 종종 찾아오는 불청객이었고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온통 적막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자민은 양로원에서 자란 걸 축복으로 여겼다.

“노인들은 젊은 시절의 짐을 벗어버리고 날씨나 목욕물 온도 혹은...일몰에 더 신경 썼지.” (벤자민)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욕심 부리고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면서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의 덧없음을 알기에 지금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순수하게 집중하게 된다. 만일 노인의 외모를 가진 아이 벤자민이 양로원이 아닌 바깥 세상 속에 자라게 되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태어나자마자 친아버지에게 마저 가차없이 버림받은 벤자민을 세상의 잣대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따뜻한 퀴니 엄마와 세상 담담한 노인들 울타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게 다행이자, 축복이었다. 세상 잣대로 볼 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벤자민이었지만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구김살 없이 바르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두려움의 무게로 피하고 싶었을 죽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노쇠한 할아버지였지만, 영락없는 아이 그대로 호기심이 왕성했던 벤자민은 양로원 바깥 세상이 몹시 궁금했다. 벤자민은 휠체어 대신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된 어느 날, 양로원에 새로 들어온 식구 오티를 따라 드디어 난생 첫 외출을 했다. 오티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들과 살며 서커스 공연을 했던 부시맨(피그미족)이었다. 버스를 함께 탄 오티와 벤자민을 아이들이 구경하듯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동물 우리에 사는 건 어땠어요?” (벤자민)

“냄새가 아주 고약했지. 그치만 원숭이들과 노는 건 아주 재미있었어. 창 던지고, 코알라랑 레슬링하고... 동물원을 나와선 여기저기 좀 떠돌아다녔어.” (오티)

“혼자서요?” (벤자민)

“삶은 외로운 거야. 우리처럼 특별한 사람들한텐 더욱 그렇지. 비밀 말해줄까? 뚱보, 말라깽이, 꺽다리 전부 다 우리만큼 외로워해. 차이라면 그들은 외로움을 무서워한다는 거지. 때론 고향의 강이 생각나. 그 강가에 다시 가보고 싶어.” (오티)

 

오티는 약속이 있다며 벤자민에게 전차를 타고 나폴레옹가를 찾아 귀가하라고 알려준 뒤 여자친구랑 사라졌다. 말도 없이 외출해 혼자서 양로원으로 돌아온 벤자민을 보고 퀴니는 화를 냈다.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는 거 보고 싶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퀴니)

하지만 벤자민에겐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1930년 추수감사절, 이젠 한쪽 지팡이만 짚고도 잘 걸을 수 있게 된 벤자민은 그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은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

“벤자민, 아주 젊어 보이는구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지팡이 하나로 걷는 게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은 거 같아.” (풀러 할머니)

“감사합니다.” (벤자민)

 

“할머니.” (데이지)

풀러 할머니가 손녀 데이지를 벤자민에게 소개했다.

 

벤자민은 6살 소녀 데이지의 푸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예쁘고 쾌활한 소녀 데이지는 스스럼없이 벤자민과 어울렸다.

“내 비밀 말해줄게. 네 비밀도 말해줘. 엄마가 딴 아저씨랑 뽀뽀하는 걸 봤는데 엄마 얼굴이 새빨개졌어. 네 차례야.” (데이지)

“나 사실 안 늙었어.”(벤자민)

“어쩐지. 늙은 사람 안 같아. 할머니랑 달라.” (데이지)

“당연하지.” (벤자민)

“아픈 거야?” (데이지)

“엄마랑 티지 아저씨가 속삭이는 걸 들었는데 난 금방 죽을 거래. 그치만...아닐 수도 있고...” (벤자민)

“넌 이상해. 다른 사람들하곤 완전히 달라. 만져봐도 돼?” (데이지)

“응.”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의 주름 가득한 노인 얼굴을 손으로 다정하게 만졌다.

 

풀러 할머니는 손녀 데이지가 벤자민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더니 화를 냈다.

“같이 놀면 안 돼. 벤자민, 넌 부끄러운 줄 알아라.” (풀러 할머니)

 

의기소침해진 벤자민을 퀴니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타이르며 위로했다.

“넌 남들과 달라. 어른 몸에 갇혀 있지. 사람들이 그걸 이해 못할 뿐이야.” (퀴니)

“난 왜 이렇게 태어났어?” (벤자민)

“이리 와. 다 주님의 뜻이란다.” (퀴니)

 

불임이었던 퀴니가 티지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낳으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벤자민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벤자민은 양로원에 새로 입소한 할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중요한 건 잘 치는 것보단 음악을 느끼는 거야. 같이 해보자. 느낌을 담아서 연주해.”

 

시간이 흘러 벤자민은 이제 퀴니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목욕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음을 실감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풀러 할머니 말처럼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는 것처럼 벤자민은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었다.

 

항구에 나가 강을 오르내리는 배를 구경하다가 승선해서 일도 하게 됐다.

“잡부 하나 필요해. 일당 2달러인데 관심 있는 사람?” (마이크 선장)

배의 선장 마이크는 벤자민을 데리고 유흥가에 갔고 돈벌이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남들 말엔 신경 끄고 네 꿈을 쫓아.” (마이크 선장)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벤자민에게 낯선 남자가 타고 있던 차를 세우며 제안을 했다.

“날씨가 나쁜데 가는 곳까지 태워줘도 되겠소?”

“친절하시군요.” (벤자민)

차에 올라탄 벤자민에게 남자가 자기 소개를 했다.

“토마스 버튼이오.” (토마스)

“벤자민입니다.” (벤자민)

남자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사색에 빠진 표정으로 인사를 전했다.

“벤자민, 만나서 반갑소! 술 한 잔 하겠소?” (토마스)

“그러죠.” (벤자민)

 

벤자민은 토마스 덕분에 난생 처음 술집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오늘 처음인게 많아요. 인생에도 때가 있나 봐요.” (벤자민)

“맞소. 무례하긴 싫지만...손이 아프시오?” (토마스)

“병을 갖고 태어났어요.” (벤자민)

“무슨 병을?” (토마스)

“늙은이로 태어났죠.” (벤자민)

“안됐군요.” (토마스)

“아뇨. 늙은 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벤자민)

“아주 오래 전에 아내를 잃었어요. 아이를 낳다가......” (토마스)

“안됐군요. 토마스 씨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벤자민)

“버튼 공장을 운영하죠. 못 만드는 단추가 없소. 지퍼 만드는 굿리치가 경쟁사이고... 당신은 무슨 일을 해요?” (토마스)

“예인선에서 일해요.” (벤자민)

 

토마스는 벤자민을 양로원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오늘 대화 즐거웠소.” (토마스)

“저도 술 즐거웠습니다.” (벤자민)

“가끔씩 안부 전하러 들러도 괜찮겠소?” (토마스)

“언제든지요. 잘 가세요, 토마스 씨.” (벤자민)

 

벤자민의 체력이 점점 더 좋아지듯이 코흘리개 어린애였던 데이지도 어느 틈에 훌쩍 소녀로 컸다. 벤자민은 데이지가 주말마다 양로원을 찾아오는 게 정말 좋았다.

 

벤자민은 풀러 할머니 몰래 데이지와 함께 양로원을 빠져 나와 자신이 일하는 예인선을 타고 강에 갔다. 데이지가 예인선 옆을 지나가던 크고 화려한 유람선을 부러워했다.

“우리도 유람선 탔으면 좋겠다.” (데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게 빠르게 변해갔다. 벤자민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던 할머니는 손수 그의 이발도 해주며 의아해했다.

“참 별일이네. 머리 숱이 많아졌어.” (할머니)

“사람들이 점점 늙어갈수록 난 점점 젊어진다면요?” (벤자민)

“그렇담...슬픈 일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야 하잖아. 끔찍한 책임이지. 삶과 죽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벤자민,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는 법이야.” (할머니)

벤자민은 할머니의 말을 심각하게 경청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고스란히 목격하면서 혼자만 계속 살아남는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최악의 재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벤자민에게 피아노와 그리움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던 할머니도 어느 가을날 세상을 떠나셨다.

 

1936년 벤자민은 17살이 됐고, 짐가방을 꾸려 작별 인사를 나누며 양로원을 떠났다. 엄마가 돼 주었던 퀴니는 울면서 뜨겁게 포옹해 주었고, 티지 아저씨는 “행운을 빈다.”고 격려해 주었다.

“사랑해요, 엄마.” (벤자민)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데이지가 뛰어왔다.

“벤자민, 어디로 가?” (데이지)

“바다로. 엽서 보낼게.” (벤자민)

“어딜 가든지 꼭 엽서 보내.” (데이지)

 

벤자민은 세상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정말로 데이지에게 엽서를 보냈다. 뉴파운드랜드, 배핀 베이, 글래스고, 리버풀, 나르비크 등... 마이크 선장과 함께 길을 떠났다. 마이크 선장이 큰 회사와 계약을 맺어서 배에 새 디젤 엔진과 장비를 달고 대서양을 누볐다. 마이크 선장과 벤자민, 주방장 프렌티스, 쌍둥이 형제인 릭과 빅, 매사에 부정적인 존 그림, 과묵하고 혼잣말을 잘 하는 커티스까지 서로 출신 배경과 성격이 제각각인 7명이 함께 배를 타고 함께 일을 하고 길을 떠났다.

 

데이지 역시 벤자민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뉴욕에 있는 발레 학교 오디션 합격과 발레단 무용수가 된 소식을 알렸다.

 

마이크 선장 눈에도 벤자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지고 있었다.

“벤자민, 처음 만났을 땐 곧 관 속에 들어갈 사람 같았는데... 요즘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자네가 더 젊어진 것 같아. 비결이 뭐야?” (마이크 선장)

“선장님이 폭음하는 게 문제죠.” (벤자민)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 벤자민 일행은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도착해 ‘겨울 궁전’이라는 호텔에서 묵게 됐다. 호텔 안 술집에는 언어, 피부색은 달랐지만 술독에 빠져 사는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벤자민은 호텔의 같은 층에 투숙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애봇이라는 유부녀를 알게 됐다. 남편 월터 애봇은 러시아 무르만스크 주재 영국 무역 대표부 대표였지만, 동시에 스파이이기도 했다. 벤자민은 엘리자베스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백지처럼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지만 내 눈엔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벤자민)

 

어느 날 밤 잠이 안 와서 호텔 로비로 내려간 벤자민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우연히 만나 함께 차를 마시게 됐다.

“뱃사람이죠?” (엘리자베스)

“선원이요.” (벤자민)

“무례한 질문 같지만...배 타기엔 나이가 좀 많지 않나요?” (엘리자베스)

“나이 제한 없어요. 일만 잘하면 되죠.” (벤자민)

 

“우리 아버진 80살이 되자 잠들면 죽는다고 밤엔 안 자고 낮잠만 주무셨어요. 그럼 안 죽을 거라면서요.”(엘리자베스)

“그래서요? 잠자다 죽었어요?”(벤자민)

“좋아하시던 의자에 앉아 돌아가셨죠. 좋아하시던 라디오 프로 들으시면서.” (엘리자베스)

“죽음을 예감했군요.” (벤자민)

“남편 따라 여기로 온 지 14개월이나 됐어요.” (엘리자베스)

“맙소사.”(벤자민)

“베이징으로 가려고 했는데 잘 안 됐죠. 동양에 가 봤어요?” (엘리자베스)

“아뇨, 안 가 봤어요. 외국에 가도 항구에만 있었고.” (벤자민)

 

엘리자베스는 벤자민에게 자신의 세상 경험을 들려 주었고,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의 방으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매일 밤 한밤중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 격의없는 대화를 함께 나누는 동안 세상은 평온했고 마음은 편안했다.

“오해하진 말아요. 그게, 보통은 유부녀가 낯선 남자하고 호텔에서 밤새 수다 떨진 않잖아요.”(엘리자베스)

“유부녀라고 해서 선입견은 없어요. 잘 자요.” (벤자민)

 

“다시 젊어진다면 바꾸고 싶은 게 많아요. 실수도 바로잡고요. 기다리기만 했어요, 뭔가를 할 수 있는 때가 저절로 찾아올 거란 환상을 갖고 젊은 시절을 허비해 버렸죠. 헛살았어요. 우리가 연인이 되면 낮엔 날 쳐다보지 마요. 해뜨기 전엔 헤어져야 하고 사랑한단 말은 절대 금지예요. 그게 규칙이에요.” (엘리자베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굳이 과거를 되돌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젊음을 낭비했던 기억은 두고두고 아깝다. 다시 돌아간다면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그건 어디까지나 늙은 지금의 공허한 미련과 욕심인 거지!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누군가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어.” (벤자민)

엘리자베스가 그를 사랑해 준 첫 번째 여자였고, 행복했다고 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벤자민이 로비에서 밤새 엘리자베스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일본의 공습 소식이 흘러나왔다.

“어제 1941년 12월 7일은 치욕적인 날입니다. 일본군이 미국을 공격했습니다.”

 

마이크 선장이 일행을 소집했고 비장하게 말했다.

“중요한 결정을 하려고 모이라고 한 거야. 미래가 걸렸지. 계획을 바꿨어. 알지 모르지만 어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어. 국민 된 도리로서 가만있을 수 없지. 우리 예인선이 해군에 징발됐어. 전함 수리, 예인, 구조 임무를 맡는 거지. 빠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말해. 배에 타는 순간 해군에 입대하는 거야.” (마이크 선장)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마누라가 아파요.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 (주방장 프렌티스)

“망설일 거 없어. 집으로 돌아가.”(마이크 선장)

“요리는 누가 해요?”

“바다에선 식중독이 사망 원인 2위야. 안전 사고가 1위고.” (존 그림)

“제가 할게요. 저, 요리 잘해요.” (벤자민)

“글쎄, 전쟁에 나가긴 좀 늙었는데... 까짓거! 일본놈들 때려 잡는데 나이 제한 있나! 전부 짐 챙겨. 일본군 잡으러 간다!” (마이크 선장)

 

벤자민은 짐을 챙기러 호텔 방문을 열었다가 바닥에 놓여있는 엘리자베스의 쪽지를 보았다.

“당신을 만나 좋았어요.”가 전부였다.

 

전쟁은 기대와 달랐다. 벤자민 일행은 파괴된 전함을 예인해서 해체했다. 전쟁이라고 하지만 아직 실감할 순 없었다. 해군이 그들의 배로 포수 데니스를 지원병으로 보내주었는데, 그는 미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의 전형이었다.

“미국만큼 자유가 보장된 나라는 없어요. 젊은이들이 양심을 들먹이며 징병을 기피하면 누가 조국을 지켜요?” (데니스)

 

불안한 앞날을 예감했는지 동료 커티스는 그동안 단 한 푼도 안 쓰고 꼬박꼬박 모아놓은 월급 뭉치를 벤자민에게 맡겼다.

“쭉 지켜봤는데 자넨 믿을만해. 내가 잘못되면 이걸 아내한테 전해줄래? 사랑했다고 전해줘.” (커티스)

 

전쟁이 마침내 벤자민 일행에게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바닷가 저편의 풍경은 뜨거운 화염에 불타 오르며 아수라장이었다.

“갑판에 집합! 꾸물대지 말고 빨리!” (마이크 선장)

 

1,300명을 태우고 가던 수송선이 격침됐고 벤자민 일행의 배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바다 위에는 시체들이 둥둥 떠 있었고, 생존자는 없었다. 충격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거대한 잠수함이 그들의 배를 공격하기 위해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도망치긴 글렀어. 전투 위치로! ”(마이크 선장)

잠수함으로부터 벤자민 일행을 향해 무지막지한 총격이 속사포로 쏟아졌고 마이크 선장과 동료들이 총격을 입고 쓰러졌다. 거대한 잠수함은 그대로 돌진해 배에 충돌했다.

벤자민은 치명상을 입은 마이크 선장에게 달려왔다.

“손 잡아줘.” (마이크 선장)

벤자민은 선장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천국이 선장님을 기다리잖아요.”(벤자민)

“현실이 싫으면 미친 개처럼 날뛰거나 욕을 하고 신을 저주해도 돼.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받아들여야 해.” (마이크 선장)

 

의연한 죽음의 자세가 멋졌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꿋꿋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배려이지 않나 싶다!

 

그 날, 마이크 선장 뿐만 아니라 1,328명의 다른 생명들도 전쟁으로 인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애국자였던 군인 데니스, 동료인 커티스, 바다에서 죽을 거라던 존, 쌍둥이 중 한 명인 빅도 목숨을 잃었다. 벤자민은 커티스 아내한테 약속대로 월급 뭉치를 보냈다. 보험판매원, 변호사, 의사 혹은 인디언 추장이 되고픈 꿈을 가졌던 그 사람들이 모두 벤자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45년 5월 벤자민의 나이 25살 때, 그는 드디어 고향 집인 양로원으로 돌아갔다. 엄마 퀴니는 항상 그랬듯이 익숙하게 노인들을 위해 식사 테이블을 준비하고 있었다.

“퀴니!” (벤자민)

“네!” (퀴니)

퀴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대답했고, 금세 벤자민을 알아보고 달려와 반갑고 감격스럽게 포옹했다.

“세상에!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얼굴 좀 보자!” (퀴니)

 

퀴니는 벤자민이 예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놀랐다.

“좀 돌아봐. 다시 태어난 거 같네. 몰라보게 젊어졌어. 옛날에 그 목사님이 기적을 일으킨 거야. 특별한 아이란 걸 난 첫눈에 알았지. 엄마 무릎 나갔어. 밤마다 무릎 꿇고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했거든. 엄마 말 기억나?” (퀴니)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벤자민)

“그렇지, 앉아. 세상 유람하면서 많은 걸 배웠니?”(퀴니)

“많은 걸 봤죠...” (벤자민)

“고통을 봤구나... 재미도 봤어?” (퀴니)

“그럼요!” (벤자민)

“그럼, 된 거야, 우리 아들.”(퀴니)

“티지 아저씨는요?” (벤자민)

“...4월에 먼저 세상을 떴다.” (퀴니)

“죄송해요.” (벤자민)

“괜찮아. 양로원엔 한두 명만 빼곤 전부 다 새로 오신 분들이야. 저 세상 갈 날만 기다리고 있지..... 정말 잘 돌아왔다. 이제 결혼하고 일자리도 잡아. 와서 좀 도와주렴.” (벤자민)

 

집은 영원한 안식처라고 했던가. 예전의 모습, 냄새, 느낌 다 그대로였다. 바뀐 거라곤 벤자민 자신뿐이었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안 지난 어느 날 아침. 유리창 밖으로 막 택시에서 내린 데이지가 양로원에 들어서는 모습을 봤고, 벤자민은 서둘러 데이지에게로 향했다. 데이지는 예전보다 훨씬 젊어진 벤자민을 알아보지 못했다.

“실례하지만, 퀴니 아줌마 계세요?” (데이지)

“데이지! 나야, 벤자민.” (벤자민)

“벤자민? 어쩜, 세상에! 정말 너구나, 벤자민!” (데이지)

데이지는 뒤늦게 알아보고 퀴니처럼 달려와 반갑게 포옹했다.

“어떻게 지냈어? 너무 오랜만이다. 언제 돌아왔어?” (데이지)

“몇 주 됐어.” (벤자민)

“전쟁에 나갔다고 아줌마한테 들었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데이지)

“난 괜찮아. 그나저나 보기 좋은 걸. 예뻐졌네!” (벤자민)

“왜 편지 멈췄어?” (데이지)

벤자민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 소녀였던 데이지가 이제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음을 알았다.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녀로.

“우리 할머니 기억해? 돌아가셨어.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운명이 틀림없어. 아니, 뭐라더라. 숙명! 유명한 점술가 케이시 알아? 그는 인간사가 미리 정해진댔는데 난 운명으로 여기고 싶어.” (데이지)

“운명이든 우연이든 만나서 기뻐.” (벤자민)

“맨해튼 가봤어? 난 강 건너편에 살아. 침대 위에 서면 엠파이어 빌딩도 보여. 어딜 가봤어? 전부 말해줘. 마지막 엽서 보냈던 게 러시아였잖아. 나도 러시아 가고 싶어. 사람들 말처럼 추워?” (데이지)

“두 배는 더 추워.” (벤자민)

“맙소사! 사람들 말처럼 넌 정말 다른 거 같아. 여자를 만났다면서, 어떻게 됐어?” (데이지)

“금방 끝났어. 저녁 먹으러 갈래?” (벤자민)

 

벤자민은 데이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레스토랑에 갔다.

“발란신 무용단에 들어간 거 말했나? 유명한 안무가인데 내 바디라인이 좋대. 한 번은 연습 중에 단원이 쓰러졌는데 그걸 즉흥적으로 안무에 넣더라니까. 극중에서 댄서가 일부러 넘어진 것처럼. 요샌 실험적인 무용이 대세야. 발레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렸어. 형식보단 댄서의 느낌을 중시하지.”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발레리나로서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전해 주었다. 하지만, 데이지가 말해준 새로운 세상은 사실 벤자민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에 그다지 귀담아 들을 순 없었다.

“이런...나만 떠들었네...담배 한 대만!” (데이지)

“담배 피우는지 몰랐네...” (벤자민)

“어른이잖아. 어른들이 하는 건 다 하는 걸. 뉴욕에선 밤새 즐기고 빌딩 너머로 뜨는 해를 구경해. 잠들지 않는 도시야. 나, 내일 돌아가.” (데이지)

“벌써?” (벤자민)

“더 있고 싶은데... D.H. 로렌스 책 읽어봤어?” (데이지)

“출판 금지 됐는데...” (벤자민)

“글들이 마치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아.” (데이지)

 

재회한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했지만, 벤자민은 주저했다.

‘우리의 삶은 기회로 결정된다. 놓쳐버린 기회에 의해서도...’ (벤자민)

지금 나에게 다가온 기회가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절호의 기회일수록 때론 크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벤자민은 점점 더 변해갔다. 이제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났고 후각과 청력은 훨씬 더 예민해졌다. 걸음걸이도 빨라졌으며, 남들이 늙어가는 동안 오직 벤자민만이 신기하게도 거꾸로 더욱 젊어졌다.

 

예전 그 때 빗길을 홀로 걷던 벤자민에게 술을 사 주고, 집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던 토마스 버튼 씨가 한 쪽 다리에 목발을 짚고 찾아왔다.

“벤자민, 나를 기억하나?” (토마스)

“그럼요, 버튼 씨. 목발은 왜?” (벤자민)

“발에 염증이 나서...” (토마스)

 

오랜만에 만난 토마스와 벤자민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아직도 위스키 칵테일을 드시는군요.” (벤자민)

“습관이야. 지금은 흥미로운 시대야. 하루에 단추를 50만개씩 만들어. 직원을 10배로 늘렸고 24시간 생산하지. 전쟁 덕분에 우리 사업이 호황이야...”(토마스)

 

근황을 얘기하는가 싶던 토마스 씨가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난 죽어가고 있네... 얼마 못 살아...” (토마스)

“유감이군요...” (벤자민)

“난...친척이 없어. 항상 혼자지. 시간 날 때 집에 한 번 찾아오게.” (토마스)

“그럴게요. (벤자민)

 

식사를 마친 후, 토마스는 벤자민을 자신의 회사로 데려가 구경시켜주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버튼에 대해 좀 아나? 124년간 이어진 우리 가문 가업이야. 작은 양복점을 하던 할아버지가 남북전쟁 직후 뉴올리언스에 왔고 그 때부터 아버지가 버튼을 만들었는데 덕분에 작은 양복점이 이렇게 큰 회사가 됐네. 난 바느질도 못 하지만...” (토마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크게 성공하셨군요.” (벤자민)

 

벤자민은 토마스 씨에게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짐작이 들었다.

“그런데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뭐죠?” (벤자민)

 

그러자, 토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벤자민...넌...내 아들이야!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구나... 넌 1차 대전 종전일에 태어났다. 네 엄마는 널 낳다가 돌아가셨지. 난 널 괴물로 생각했다. 네 엄마한테 널 잘 돌보겠다 했지만...... 널 버리지 말았어야 했어...” (토마스)

 

토마스는 호숫가 여름 별장에서 찍었던 가족 사진이며, 결혼 사진 등을 보여 주었다.

“네 엄마의 이름은 캐롤라인 머피. 할아버지 댁 주방에서 일했는데 아일랜드 태생으로 1903년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와 뉴올리언스에 정착했어. 난 네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어. 1918년 4월 25일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그 날 네 엄마와 결혼했지.” (토마스)

 

내내 버림받았다가 친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져서야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고, 그제서야 존재를 인정받게 된 자식의 심정은 어떨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죠?” (벤자민)

“내 전 재산을 너한테 남길 거야.” (토마스)

 

벤자민은 돌아섰다.

“갈게요.” (벤자민)

“어디로?” (토마스)

“집에요.” (벤자민)

벤자민은 양로원으로 돌아갔다.

 

퀴니는 벤자민의 얘기를 듣고 분노했다.

“그렇게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면 반겨줄지 알았대? 웃기지 말라고 해! 하나님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달랑 18달러를 담요에 넣어놨더라. 18달러랑 더러운 기저귀......” (퀴니)

 

7번이나 번개를 맞고도 살아남은 양로원 노인이 벤자민을 보고 말했다.

“한 쪽 눈은 멀고, 잘 듣지도 못해.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하려던 말도 자꾸 까먹어. 그렇지만 알아? 이렇게 살아있는 걸 하나님께 감사한다.”

 

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벤자민은 밤 늦게 다시 토마스를 찾아갔다. 잠들어 있는 토마스를 깨워 바닷가 일출을 마지막으로 함께 보았다. 마이크 선장의 말을 기억했다.

“현실이 싫으면 미친 개처럼 날뛰거나 욕을 하고 신을 저주해도 되지만 마지막 순간에 받아들여야 한다.” (마이크 선장의 말)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친아버지의 죽음을 냉정하게 외면할 순 없지 않았을까.

 

갓난아기 벤자민을 버린 것에 대해 분노했던 퀴니 역시 토마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벤자민을 위로했다. 어쨌거나 자신의 아들로 키운 벤자민의 친부가 아니던가!

“근사한 장례식이야. 네 엄마 곁에 묻히실 거다.” (퀴니)

“내 어머니는 당신이세요.” (벤자민)

“내 아들!” (퀴니)

 

친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후, 벤자민은 꽃다발을 들고 뉴욕에 있는 데이지의 발레 공연장을 찾았다.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설 용기가 이제 드디어 생겼나 보다!

“벤자민, 여긴 웬일이야?” (데이지)

“널 만나고 싶어서.” (벤자민)

“미리 연락하지. 깜짝 놀랬잖아.” (데이지)

“너한테서 눈을 못 떼겠더라. 환상적이었어.” (벤자민)

“고마워. 칭찬 들으니까 좋네.” (데이지)

 

데이지는 공연 뒷풀이에 벤자민을 데려갔다. 그리고 함께 공연하는 남자 단원 데이빗을 소개했다.

“데이지 할머니랑 친구라던가, 뭐 그랬죠?” (데이빗)

 

벤자민은 데이지가 데이빗과 다정하게 키스하며 단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에 안타깝게도 소외감을 느끼며 혼자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서둘러 그를 불러 세운 데이지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올 걸 몰랐잖아. 젠장! 벤자민. 뭘 기대한 거야? 만사 제쳐두고 널 반겨주라고? 나도 내 삶이 있어.” (데이지)

“자기야, 안 가?” (데이빗)

“벤자민, 같이 가자. 음악도 좋고, 다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같이 어울리길 권했다.

 

“내 잘못이야. 연락했어야 했어. 그냥 찾아오면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벤자민)

“데이지, 빨리 가자.” (데이빗)

“좋은 사람 같아. 사랑해?” (벤자민)

“그런 거 같아.” (데이지)

 

서로 어긋난 타이밍이었다.

“잘 됐어. 고향에서 보자.” (벤자민)

“그래...” (데이지)

 

데이지는 기다리는 일행들을 향해 돌아섰고, 공연 잘 보았다는 벤자민의 인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묻혀 버렸다. 어긋난 타이밍! 사실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뒤늦게 알게 된 친아버지 토마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털어놓고 싶었다.

 

23살 데이지는 한창 잘 나가는 댄서로서 5년 동안 런던, 비엔나, 프라하...전 세계를 돌며 열정적으로 공연을 했다. 하지만, 벤자민을 잊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시간이 서로 엄연히 다르게 따로 흐를지라도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큼은 별 차이가 없었다. 타이밍은 어긋났어도 마음만큼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을 거꾸로 사는 벤자민은 이제 오토바이를 능수능란하게 타고 다니는 젊은 청년이 됐다.

‘삶은 단순했고 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벤자민)

‘우린 살아가면서 끝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우연이든 고의든 그걸 막을 방법은 없다. 삶은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의 연속이다. 누구든 통제할 수 없다.’ (벤자민)

 

벤자민은 갑작스런 교통 사고를 당해 다리가 으스러진 데이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 파리까지 날아갔다.

“데이지...” (벤자민)

“누가 알려줬어?” (데이지)

“네 친구가 전보로 알려줬어.” (벤자민)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지만 난 괜찮아.” (데이지)

데이지는 난처해 했다.

“너라도 왔을 거야.” (벤자민)

 

이제는 멋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벤자민을 보고 데이지는 놀랐다.

“어머나! 벤자민, 네 모습을 봐, 완벽해.” (데이지)

멋진 벤자민에게 흉하고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들키기 싫었다.

“오지 말지 그랬어. 이런 모습은 보이기 싫어.” (데이지)

데이지의 다리뼈는 5조각이 났고, 장기간 치료를 받으면 걸을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춤은 앞으로 더 이상 못 추게 되고 말았다.

 

“나랑 집에 가자. 내가 돌봐줄게.” (벤자민)

“뉴올리언스에는 안 가.” (데이지)

“그럼 내가 파리에 있을게.” (벤자민)

“모르겠어? 네 도움 필요 없어. 이런 꼴 됐다고 너랑 사귀긴 싫어. 뉴욕에서 말했잖아. 왜 듣질 않아?” (데이지)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벤자민)

“우린 더 이상 애들이 아냐. 제발... 내 삶에서 사라져줘.” (데이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도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여자의 심리는? 화성에서 온 남자 VS 금성에서 온 여자!!!

상심한 데이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벤자민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잔인하게 굴었던 데이지를 벤자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벤자민은 바로 떠나지 않고 계속 파리에 머물며 데이지 곁을 맴돌았지만 정작 그녀는 몰랐다.

 

데이지는 회복해서 다시 걷게 됐을 때, 파리를 떠나 기차를 타고 프랑스 남부로 갔다. 고향으로 돌아간 벤자민은 보트 조종법을 배워 친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보트를 타고 항해에 나섰으며, 두세 명의 여성을 사귀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 봄 이윽고 데이지도 고향에 돌아왔다. 퀴니는 벤자민에게 그랬듯이 엄마처럼 포근하고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그동안 왜 편지 한 번 안 했어? 죽은 사람 마냥...” (퀴니)

“혼자 생각 좀 하고 싶었어요.” (데이지)

“널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내가 안 틀렸길 바라마.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거든. 좋은 시간 보내렴.” (퀴니)

퀴니는 엄마답게 벤자민과 데이지의 사이를 진작부터 알았나보다.

 

벤자민은 데이지와 함께 보트를 타고 플로리다 키스제도 연안을 항해했다. 드디어 두 사람의 시간이 어긋나지 않고 만났다.

“26살 때 연인이 안 된 게 참 다행이야. 난 너무 젊었었고 자긴 너무 늙었었어. 지금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봐.” (데이지)

“자기와 있는 매 순간을 소중히 보낼 거야.” (벤자민)

 

함께 행복한 동안, 데이지는 자연스럽게 늙어갔고 벤자민은 계속 점점 더 젊어졌다.

“자긴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데 난 주름 투성이야. 불공평해.” (데이지)

“난 자기 주름이 좋아. 많지도 않지만.” (벤자민)

“젊어지는 기분이 어때?” (데이지)

“잘 모르겠어. 나도 못 믿겠거든.” (벤자민)

“내 피부가 늘어져도 사랑해줄 거야?” (데이지)

“내가 여드름 생겨도 사랑해줄 거야? 이불에 오줌을 싸도? 어둠이 무섭다고 울어도?” (벤자민)

“무슨 생각해?” (데이지)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 정말 슬픈 일이지.” (벤자민)

“영원한 것도 있어.” (데이지)

데이지가 할머니가 되면 벤자민은 갓난 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항해에서 돌아온 벤자민과 데이지는 퀴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벤자민은 퀴니를 티지 아저씨 곁에 묻고, 친아버지의 집을 팔아 데이지와 둘만의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데이지는 그 집을 참 마음에 들어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이웃인 반담 부인은 물리치료사였고, 집 근처엔 수영장이 있었다. 수영을 즐기던 데이지는 활기가 넘치는 젊은 여성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상심에 빠졌다.

“사고가 안 났으면 좀 더 활동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무용가라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순 없는 거야. 사고가 안 났어도 당신은 지금 여기 있었을 거야.” (벤자민)

“늙어가는 게 너무 싫어.” (데이지)

 

벤자민은 친아버지와 함께 감상했던 일출 명당 바닷가 벤치에 데이지와 나란히 앉아 일몰 풍경을 바라보았다.

“미련 따윈 버릴게. 약속해. (데이지)

벤자민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은 거다. 영원히 완벽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벤자민의 혼잣말)

 

데이지는 안정을 찾았고, 댄스 스쿨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발레를 가르쳤다.

 

“당신은 1918년에 태어났으니까 49살이고, 난 43살이니까 나이가 비슷해졌네. 또 달라지겠지만...” (데이지)

“이제야 서로 맞는 것 같아. 지금 이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벤자민)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폭탄 고백을 했다.

“나 임신했어. 간호사가 아들이란 암시를 했는데 내 생각엔 딸 같아. 걱정 하는 거 알아.” (데이지)

“걱정 돼.” (벤자민)

“뭐가 제일 걱정돼?” (데이지)

“나처럼 태어날까봐.” (벤자민)

“그럼 더 사랑할 거야. (데이지)

“난 점점 더 어려질 텐데 어떻게 아빠 역할을 해? 아이한테 불공평해.” (벤자민)

“누구든 늙으면 기저귀를 차게 돼. 내가 잘할게. 당신과 같이 가정을 꾸리고 싶어.” (데이지)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주고 싶지만...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문제라...” (벤자민)

“병 있다고 자식 못 가져? 당신도 얼마든지 아빠가 될 수 있어. 힘들 걸 알면서도 아기를 가진 거야. 당신을 사랑하니까. 화장실 다녀올게.” (데이지)

 

벤자민은 데이지가 화장실 간 사이, 식당 안 TV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들었다.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넌 최고령 여성, 34시간 22분 14초입니다. 올해 68세인 엘리자베스 애봇씨가 그 주인공이죠. 부인, 소감 한마디만 부탁합니다.” (리포터)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요.”(엘리자베스)

러시아 호텔에서 만났던 바로 그 엘리자베스가 젊은 시절 꿈을 68세에 드디어 이룬 걸 보고 벤자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데이지도 엘리자베스도 참 대단한 그녀들이다. 심각한 불치병이 유전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데이지도,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을 포기하지 않고 70세가 다 돼 기어히 이루어낸 엘리자베스도 참 대단한 그녀들이다. 어쩌면 한없이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었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는 선택을 피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봄날, 데이지가 드디어 출산했다. 걱정에 노심초사했던 벤자민은 산모와 딸 모두 건강하다는 의사 말에 안도했다. 2.4kg의 건강한 딸이었다. 벤자민은 딸에게 친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캐롤라인이라 지었다.

 

캐롤라인은 계속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했다.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캐롤라인을 잘 키워줄 진짜 아빠를 찾아.” (벤자민)

“무슨 소리야?” (데이지)

“같이 늙어갈 아빠.” (벤자민)

“당신이 어떻게 되든 사랑할거야.” (데이지)

“필요한 건 아빠지 소꿉 친구가 아냐.” (벤자민)

“내가 싫어졌어? 내가 너무 늙어서?” (데이지)

“그런 거 아냐. 당신 혼자 아기 둘을 키울 순 없어.” (벤자민)

그랬다. 데이지는 늙어가고 캐롤라인은 무럭무럭 자랄 테고 벤자민은 갓난 아기가 될 것이다. 데이지는 딸 캐롤라인을 키우면서 동시에 갓난 아기로 죽어가는 남편 벤자민을 보살펴야 한다. 벤자민은 데이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무게의 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딸 캐롤라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과 고통이기도 하다.

 

어느덧 캐롤라인의 첫 번째 생일 파티를 했고 집안은 애들로 가득했다.

“눈 깜짝할 새 고등학생이 될 거요. 연애도 하고...” (파티 참석한 남자가 벤자민에게)

 

벤자민은 친아버지가 물려주었던 호숫가 여름 별장, 버튼 공장, 보트를 판 돈을 모두 정리해 은행에 넣어두었다. 데이지와 딸 캐롤라인이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딸이 자기를 기억할 만큼 자라기 전에 서둘러 두 사람 곁을 떠났다. 빈손으로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소중한 두 사람 곁을 억지로 떠나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혼자가 된 그는 살아가는 내내 얼마나 외롭고 그리워할까???

 

벤자민은 떠나서도 딸에게 계속 엽서를 보내왔고, 그 안에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고스란히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1970년 2살 생일 축하해!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싶구나.”

“5살, 학교 입학식에 널 데려가고 싶구나.”

“6살, 네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구나!”

“1981년 13살, 남자애를 쫓아 다닌다면 말리고 싶구나. 네가 슬퍼할 땐 안아주고 싶어. 아빠 노릇을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텐데...”

 

인도로 배낭 여행을 가서 보낸 엽서에는 인생 선배이자 멘토로서 아낌없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살아가면서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건 없단다. 넌 뭐든지 될 수 있어. 꿈을 이루는데 시간 제한은 없단다. 지금처럼 살아도 되고 새 삶을 시작해도 돼. 최선과 최악의 선택 중 최선의 선택을 내리길 바라마. 네가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걸 느꼈으면 좋겠다. 너와는 다른,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조금이라도 후회가 생긴다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렴.” (벤자민)

 

그리움에 졌나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곁을 그렇게나 멀리 홀연 떠났던 벤자민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청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왜 돌아온 거야?”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을 보고 야속한 눈물을 흘렸고, 마침 딸 캐롤라인이 엄마를 부르며 다가왔다. 벤자민은 어느새 12살 소녀로 성장한 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캐롤라인에게 벤자민을 친아버지로 밝힐 수가 없어서 아는 지인으로 소개했다.

“캐롤라인, 벤자민 아저씨야. 네가 아기 때 본 적 있어.” (데이지)

“안녕!” (벤자민)

“여보!” (현재의 남편 로버트)

“가족이 잘 알던 친구예요, 벤자민 버튼! 이 쪽은 남편 로버트예요.” (데이지)

“안녕하시오!” (로버트)

 

남편 로버트는 벤자민에게 만나서 반가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캐롤라인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말 예쁘다. 엄마를 쏙 빼닮았어. 춤도 잘 춰?” (벤자민)

“별로야.” (데이지)

“그건 날 닮았나봐.” (벤자민)

“아주 착한 아이야. 좀 산만하긴 하지만. 12살 땐 다 그렇잖아. 아이를 볼 때마다 당신 생각이 나. 남편은 전 부인과 사별했는데 똑똑하고 자상한 사람이야. 모험심도 강하고 애한테 잘해줘.” (데이지)

“다행이군.” (벤자민)

“당신 더 젊어졌네!” (데이지)

“겉모습만 그래.” (벤자민)

“당신이 옳았어. 아기 둘은 못 키웠을 거야. 난 그렇게 강하질 않아. 어디서 지내?” (데이지)

“폰차트레인 호텔에 묵고 있어. 뭘 할진 모르겠고. 하지만......” (벤자민)

벤자민이 머뭇거리자, 데이지가 말했다.

“가족(남편과 딸)이 기다려.” (데이지)

데이지가 서둘러 가족에게 가버렸고, 우두커니 벤자민만 남았다.

 

호텔로 온 벤자민은 이제야 왜 돌아왔느냐는 데이지의 물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였다.

“괜찮아?” (벤자민)

“미안해. 왜 왔는지 모르겠어. 영원한 건 없어.” (데이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해.” (벤자민)

데이지는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갔고, 벤자민은 다시 멀어졌다.

 

무심한 세월이 또 흐르고 흘러 남편 로버트가 죽었고, 이제 어느덧 할머니가 된 데이지는 고향 양로원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아동복지과 직원이 버려진 건물에서 발견한 한 남자 아이의 배낭 안에 일기장 뭉텅이와 함께 데이지의 연락처가 있었다.

“아이 상태가 좋질 않아요. 자기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모르죠.” (아동복지과 직원)

 

데이지가 귀에 익숙한 피아노 연주 소리에 다가가 보니, 소년이 된 벤자민이었다.

“벤자민!” (데이지)

데이지가 벤자민에게 다가서려 하자, 아동복지과 직원이 조언했다.

“손 대면 싫어해요. 인지력이 떨어져요. 의사는 전형적인 치매 초기 증상이래요.” (아동복지과 직원)

벤자민은 몸만 소년이고, 정신은 치매 노인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벤자민, 나 누군지 알아보겠니? 데이지야.” (데이지)

“난 벤자민!” (벤자민)

“만나서 반갑구나, 벤자민. 옆에 앉아도 될까? 네 연주를 듣고 싶어.” (데이지)

“날 알아?” (벤자민)

 

데이지는 매일 양로원에 들러서 벤자민을 보살폈다.

“전부 못됐어! 거짓말하지 말란 말이야!” (벤자민)

금방 식사한 걸 잊어버린 벤자민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할머니랑 뭘하며 놀지 생각해볼까?” (데이지)

“내가 기억 못하는 게 많은 거 같아. 뭐랄까...오래 산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 안 나.” (벤자민)

“괜찮아. 기억 못해도 돼.” (데이지)

벤자민은 자기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자주 잊어버렸다. 그런 벤자민을 보살피는 건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높디 높은 지붕 꼭대기 위에 위험한 줄도 모르고 올라가 앉아 있었다.

“여기선 전부 다 보여. 강도 보이고 엄마가 묻힌 묘지도 보여. 내가 날 수 있으면?” (벤자민)

“하늘을 나는 사람들을 알아. 내려오면 다 말해줄게.”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이 다섯 살로 어려졌을 때부턴 같이 살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벤자민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나이였다. 할아버지 외모의 벤자민이 다섯 살 데이지를 처음 만났었는데 지금은 할머니 데이지가 다섯 살 벤자민을 마주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벤자민은 걷는 법을 잃어버렸고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가 됐다. 몸만 갓난 아기이지 사실은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이었다.

 

2003년 봄, 포대기에 쌓인 갓난 아기 벤자민이 데이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데이지는 벤자민이 그녀를 알아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벤자민은 마치 잠이 들 듯이 데이지의 품 안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치매로 거의 모든 기억을 다 잃고 죽어 가면서도 끝내 필사적으로 붙잡고 지켰을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해.”라고 했던 벤자민의 진심!!!

 

벤자민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세월이 더 흘러 이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데이지는 병원 침대에 누워 딸 캐롤라인에게 벤자민의 일기장과 함께 그간의 모든 역사를 그제서야 털어 놓았다.

“아빠를 (더 빨리) 알았더라면...” (캐롤라인)

“이제 알잖니.” (데이지)

 

데이지는 왜 이렇게 늦게서야 딸에게 벤자민의 존재를 알린 걸까? 좀 더 일찍 알려 주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내가 캐롤라인이었다면 엄마가 많이 야속했을 것 같다. 엄마 평생의 사랑이자, 운명이었으며, 자신의 친아버지인 벤자민에 대해 엄마에게 궁금한 것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을 텐데 그 중요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허리케인으로 병원 내부에 울린 사이렌 소리를 듣고 캐롤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데이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을 만큼 최악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벤자민이었지만, 그는 원망이나 자기연민에 허우적거리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지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삶을 살았다.

 

앞으로, 우리 앞으로 계속 밀려들 시련의 파도가 또 얼마나 크고 높고 셀지……퀴니의 말처럼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부디 모쪼록 벤자민처럼 끝까지 뚜벅뚜벅 꿋꿋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사랑을 놓지 않고 지킬 수 있기를!!!

 

새해의 시작에 인생과 사랑, 책임을 되새기게 하는 영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강추~~★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일정 커미션을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