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 그 중에서도 육체적으로 아주 많이 늙어서 손이고 발이고 뜻대로 도무지 한발짝 움직이기도 버거워진 채로 살게 되는 삶의 질이란 건 얼마나 힘겨울까? 외출은 고사하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 한 번 가기도 보통 어렵지 않은 힘겨운 현실 속에서 그 도움을 기대할만한 가족이나 친구마저 없이 쓸쓸히 혼자인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나마 수당을 받고 직업적으로 일하는 간병인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마저 없다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을 버텨야 한다면?

 

주방 식탁 한가운데에 꼼꼼하게 정돈된 채로 단정하게 줄 맞춰 놓여 있던 머스트비 리스트 중에서도 유난히 도리스 할머니에게 소중했던 그것은 바로 가장자리가 구부러져 누런 속지가 삐져나온 붉은색 낡은 가죽 수첩이었다. 그 빨간 수첩은 단순한 수첩이 아닌 도리스 할머니의 인생이었고 그녀의 지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도리스는 이 빨간 수첩을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종손녀 제니에게 남겼다.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이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제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니? 오고 가는 그 모든 이름에 대해 말이야.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또 어떤 이름은 사랑하는 이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고. 나는 이따금 내 수첩을 들춰 본단다. 수첩은 내 삶의 지도 같은 것이 되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그것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싶어. 너, 날 기억해줄 수 있도록. 일종의 유언과 같은 거지. 네게 내 기억들을 줄게. 그 기억들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도리스)

 

도리스의 빨간 수첩은 그녀가 열 살이었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특별한 생일 선물이었다.

“거기에 네 친구들을 모두 적어두렴. 네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말이야. 앞으로 네가 가게 될 흥미진진한 모든 장소에서 만날 사람들. 그러면 넌 그들을 절대 잊지 않는 거지.” (아버지)

 

첫 페이지엔 아버지가 직접 적어놓은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 일터의 주소, 전화번호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고, 졸지에 미망인이 된 엄마는 도저히 가난한 살림을 감당할 수 없어서 아직 어렸던 도리스를 학교 가는 것도 중단시킨 채 부잣집 가정부로 홀로 떠나 보냈다. 이제 겨우 열 살을 갓 넘은 소녀가 의지할 데 하나 없이 남의 집 가정부 살이를 버텨내기란 얼마나 외롭고 무섭고 힘들었을까.

다행히도 도리스 마음에 관심을 가진 평생의 친구이자 예술가(화가)인 예스타를 알게 돼 낯설고 힘든 환경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가정부 생활 도중 눈에 띄는 외모로 패션 디자이너에 의해 모델로 발탁되었고, 평생의 사랑 앨런 스미스도 만났다. 도리스의 생각, 갈망, 슬픔을 다 얘기할 수 있었던 앨런. 그녀의 얘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었고 이해해주었던 앨런. 그녀를 웃게 하고 그녀의 세계관 전체를 뒤바꿔놓았던 앨런.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친구와도 연인과도 그녀가 그들과 함께 충분히 행복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말이 모델이지, 실상은 백화점이나 상점 진열장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 장시간 살아있는 마네킹 역할을 하는 고된 직업이었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과의 반복이었던 기나긴 하루, 유지하기 힘든 헤어스타일, 벗겨지고 부어오른 발, 모공 속으로 녹아들어가 피부를 화끈거리게 하는 화장품.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

 

도리스가 만약 앨런과의 결혼을 이루었다면 그녀는 계속 모델 일을 했을까, 아니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도리스는 오래 떨어져 살았던 어머니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가족이 된 여동생 앙네스의 보호자로 열심히 살았지만, 영혼을 사로잡았던 사랑이 허무하게 엇갈려 떠나버린 그녀의 삶은 이후로 계속 외롭고 황량했으며 끔찍하기조차 했다.

 

도리스는 빨간 수첩 뿐만 아니라, 평생의 친구 예스타에게서 받았던 편지들이며 추억 속의 사진들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잊어버릴 일들을 다 기억나게 해주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어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스)

빨간 수첩 속에 살아있던 그 이름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줄이 그어지고 황금색 잉크로 사망이라고 쓰여지는 일이 늘어났다. 다행히도 예스타와는 재회해서 20년을 같이 살았고, 그의 유산까지 물려 받았지만 예스타 역시 세월 속에 황금색 잉크로 쓰여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종손녀 제니는 멀리 떨어진 스웨덴 스톡홀름 고향을 외롭게 지켰던 도리스가 얼마나 많은 날을 혼자서 보냈을까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혼자서 보냈을까. 친구 하나 없이 가족도 없이 그저 한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만을 품고서. 그 아름답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어 도리스 역시 그들 중 한 명이 될 것이었다. 죽은 이름들 중 하나. 사망.

 

아흔 여섯의 도리스.

“나는 아흔 여섯이 넘었어요. 남은 운은 별로 없지요.” (도리스)

 

제니에게 도리스 할머니는 엄마와도 같았다. 약물 중독이었던 친엄마는 제니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버릴 생각까지 했는데 도리스 할머니가 기꺼이 제니를 받아주었고 아낌없이 사랑으로 돌봤던 것이다.

 

제니는 남편 윌리와 힘을 합해 도리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평생의 사랑을 재회할 수 있게 했다. 무려 70년 만의 재회였다. 평생 단 한 번의 진실된 사랑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볼 수 없었던 앨런.

 

“사람은 첫 번째 진정한 사랑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들 하지. 그 사랑은 사람들의 신체 기억 깊숙한 곳에 둥지를 만든다고들 해. 바로 그곳에서 앨런은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단다. 전사한 병사 혹은 사망한 연금 수급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여전히 내 안에 살고 있어. 내 주름진 몸속 깊은 곳에 말이야. 그리고 나는 무덤으로 갈 때 그 사람을 데리고 갈 거야. 하늘나라에서 그를 찾아내길 바라면서, 만일 그 사람이 늘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분명 평생 그를 따랐을 거야.” (도리스)

 

두 사람은 비록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서였지만 헤어진 지 무려 70년 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앨런 역시 도리스처럼 늙고 병들었지만, 도리스에게 앨런이 그랬듯이 앨런에게 도리스 역시 평생의 진실된 사랑이었다.

“당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도리스.”

“기억나요. 당신과 함께 걸었던 걸음 하나하나가 다 기억나요. 그때는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앨런)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도리스를 보면서 앨런의 주름진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도리스는 앨런을 재회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으며, 제니에게 마지막 짧은 글을 남겼다.

“제니, 삶을 두려워하지 마. 그냥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거야. 웃어. 인생이 너를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라, 바로 네가 인생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거란다.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그것을 잡아.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좋은 것을 이뤄내라. 세상 무엇보다 널 사랑한다. 언제나 그랬어. 그걸 절대 잊지 마라. 내 사랑하는 제니.” (도리스)

 

앨런은 도리스가 세상을 떠난 뒤 48시간도 채 안 돼 같은 길로 떠났다.

 

도리스와 앨런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단한 삶과 가혹한 운명을 담담하게 살아내면서도 평생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지켰다.

 

너도 나도 흔한 유행처럼 가볍고 쉽게 만나서 쉽게 헤어지거나, 하루하루 감당해야 할 치열한 현실이 너무 버거워 애시당초 사랑도 우정도 사치라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각박한 요즘 시대에 96년 평생을 지켜온 사랑과 우정의 삶은 한 편의 순수한 동화같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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