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도자가 수도원장에게 자신은 그 수도원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다.
“이곳의 수도자들은 너무 시끄럽습니다. 수도 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수도자에 대한 비난이나 정치에 관한 논쟁, 심지어 미스 월드를 잘못 뽑았다느니 하면서 떠듭니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만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수도원장이 말했다.
“이해하네. 하지만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물을 가득 채운 유리잔을 들고 수도원을 세 바퀴만 돌아 주게. 단, 물을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되네. 그다음에는 떠나도 좋네.”
젊은 수도자는 이상한 부탁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래 걸리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리잔에 물을 가득 따라 손에 들고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수도원을 돌았다.
세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수도원장에게 와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마쳤습니다.”
그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순간, 수도원장이 물었다.
“유리잔을 들고 수도원을 돌 때, 혹시 수도자들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는가? 잡담을 하거나 논쟁을 벌이던가?”
수도자가 듣지 못했다고 하자 수도원장이 말했다.
“그 이유를 아는가? 그대가 유리잔에 온 존재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쏟지 않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에 어떤 소리도 그대의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이다. 어느 수도원으로 가든 잡담과 논쟁과 부정적인 말들이 그대를 둘러쌀 것이다. 천국에 가지 않은 한 누구도 소란스럽고 세속적인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럴 때 자신이 들고 있는 유리잔의 물에 집중해야 한다. 그대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 그대의 수행과 성장에. 그러면 어떤 것도 그대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작가든 수도자든 이상적인 공간은 사실 외부의 장소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 그리고 작가와 수도자는 ‘치열한 노동자’, 혹은 자신의 열기에 스스로 화상 입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지 않은가. 세상의 그 어떤 일에 몰입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공평한 빈 페이지를 앞에 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사람들이다. 그 내면으로 들어가는 쉽고 쾌적한 장소는 없다. 단지 나 자신과, 내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 일에 대한 진실한 의지와 몰입만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언어는 무엇을 쓰고 있고, 내 인생의 물감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자신을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없다.
시인 찰스 부코스키는 창작자에 대한 생각을 시에 담았다.
“창작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탄광 속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해도 창작을 한다. 작은 방 한 칸에 애가 셋이고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해도 창작을 한다. 도시 전체가 지진과 폭격과 홍수와 화재로 흔들려도, 고양이가 등을 타고 기어올라도 창작할 사람은 창작을 해낸다. 공기나 빛, 시간과 공간은 창작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러니 변명은 그만두라. 새로운 변명거리를 찾아낼 만큼 자신의 인생이 특별히 더 길지 않다면.”
이상적인 작업 환경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탄생시키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글도 나는 수십 명이 오르내리는 동네 빵집의 이층 테이블, 내가 사는 세상의 작은 모퉁이에서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와서 아는 체를 했지만,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하고 ‘류시화는 지금 인도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