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 작품

#장르 :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감독 : 데이빗 핀처

#출연 : 브래드 피트/케이트 블란쳇/틸다 스윈튼/줄리아 오먼드 등...

 

♣스포일러 있어요~^^

 

“1985년 4월 4일 뉴올리언스. 이게 나의 마지막 유언이다. 남길 게 별로 없다. 재산도 없고 이 세상에 왔을 때처럼 빈손으로 떠난다. 나의 특별한 삶을 아직 기억이 날 때 적어둔다. 내 이름은 벤자민 버튼. 난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 1차 대전이 끝나 모두가 축제에 휩싸인 기쁜 밤이었지. 날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은혜를 어찌 잊겠는가.” (벤자민 버튼)

 

벤자민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벤자민을 낳자마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남편에게 아들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 아들의 외모를 확인한 아버지는 경악하면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어느 양로원 계단에 버렸다.

 

“아무리 흉측해도 너도 주님의 자식이야." (퀴니)

양로원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 퀴니는 측은지심으로 아기를 데려와 의사에게 진찰을 맡겼다.

“백내장이라 앞을 거의 못 보고, 듣지도 못할 거야. 관절염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피부는 탄력이 없고 손발은 경직됐어. 갓 태어난 아기지만 몸은 죽음을 앞둔 80대 노인과 다를 게 없어.” (의사)

“죽어가요?” (퀴니)

“살아보지도 못하고 세상 하직하는 거지. 누구야?” (의사)

퀴니는 순발력 있게 둘러댔다.

“언니가 백인 유부남과 눈 맞아서 낳았는데 천벌을 받은 건지 흰 피부를 가졌어요.” (퀴니)

“버려진 아기들을 돌봐주는 곳이 있어. 여기선 못 키워. 재단 지원이 줄어서 근근이 버티는 상황인데 아기까지......” (의사)

“죽는다면서요...” (퀴니)

“죽는 게 이 아이의 운명이야.” (의사)

“아뇨. 이 아기는 기적이에요. 좀 달라 보일 뿐이죠.” (퀴니)

 

퀴니는 아기를 기꺼이 양로원 새 식구로 맞아들였고, 이름을 벤자민으로 지어주었다. 퀴니는 벤자민을 양로원에 거주 중인 노인들에게 소개했다.

“건강하지 않으니까 잘 보살펴줘야 돼요. 빨리 늙는 병에 걸려 오래 못 살거래요.” (퀴니)

“우리랑 똑같네.” (노인들)

 

퀴니의 연인이자, 양로원에서 요리 담당인 티지는 반대했다.

“정신 나갔어? 당신이 불임이라 아기 못 갖는 건 알지만 이 아기를 키우는 건 안 돼. 괴물이잖아.” (티지)

“제발...운명은 아무도 몰라.”(퀴니)

 

벤자민은 그렇게 양로원에서 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퀴니를 엄마로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기가 아닌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인 줄도 알았다.

 

“엄마. 내가 점점 변해가는 것 같아.” (벤자민)

“딴 사람들도 다 변해. 넌 좀 다르지만. 삶의 종착역은 다 같아. 어떤 길로 가는지가 다를 뿐이지. 넌 네 길을 가는 거야.” (퀴니)

“엄마, 난 얼마나 더 살아?” (벤자민)

“아직 살아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원래는 오래 못 산댔어.” (퀴니)

 

노인들이 가득한 양로원에서 죽음은 종종 찾아오는 불청객이었고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온통 적막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자민은 양로원에서 자란 걸 축복으로 여겼다.

“노인들은 젊은 시절의 짐을 벗어버리고 날씨나 목욕물 온도 혹은...일몰에 더 신경 썼지.” (벤자민)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욕심 부리고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면서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의 덧없음을 알기에 지금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순수하게 집중하게 된다. 만일 노인의 외모를 가진 아이 벤자민이 양로원이 아닌 바깥 세상 속에 자라게 되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태어나자마자 친아버지에게 마저 가차없이 버림받은 벤자민을 세상의 잣대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따뜻한 퀴니 엄마와 세상 담담한 노인들 울타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게 다행이자, 축복이었다. 세상 잣대로 볼 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벤자민이었지만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구김살 없이 바르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두려움의 무게로 피하고 싶었을 죽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노쇠한 할아버지였지만, 영락없는 아이 그대로 호기심이 왕성했던 벤자민은 양로원 바깥 세상이 몹시 궁금했다. 벤자민은 휠체어 대신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된 어느 날, 양로원에 새로 들어온 식구 오티를 따라 드디어 난생 첫 외출을 했다. 오티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들과 살며 서커스 공연을 했던 부시맨(피그미족)이었다. 버스를 함께 탄 오티와 벤자민을 아이들이 구경하듯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동물 우리에 사는 건 어땠어요?” (벤자민)

“냄새가 아주 고약했지. 그치만 원숭이들과 노는 건 아주 재미있었어. 창 던지고, 코알라랑 레슬링하고... 동물원을 나와선 여기저기 좀 떠돌아다녔어.” (오티)

“혼자서요?” (벤자민)

“삶은 외로운 거야. 우리처럼 특별한 사람들한텐 더욱 그렇지. 비밀 말해줄까? 뚱보, 말라깽이, 꺽다리 전부 다 우리만큼 외로워해. 차이라면 그들은 외로움을 무서워한다는 거지. 때론 고향의 강이 생각나. 그 강가에 다시 가보고 싶어.” (오티)

 

오티는 약속이 있다며 벤자민에게 전차를 타고 나폴레옹가를 찾아 귀가하라고 알려준 뒤 여자친구랑 사라졌다. 말도 없이 외출해 혼자서 양로원으로 돌아온 벤자민을 보고 퀴니는 화를 냈다.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는 거 보고 싶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퀴니)

하지만 벤자민에겐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1930년 추수감사절, 이젠 한쪽 지팡이만 짚고도 잘 걸을 수 있게 된 벤자민은 그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은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

“벤자민, 아주 젊어 보이는구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지팡이 하나로 걷는 게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은 거 같아.” (풀러 할머니)

“감사합니다.” (벤자민)

 

“할머니.” (데이지)

풀러 할머니가 손녀 데이지를 벤자민에게 소개했다.

 

벤자민은 6살 소녀 데이지의 푸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예쁘고 쾌활한 소녀 데이지는 스스럼없이 벤자민과 어울렸다.

“내 비밀 말해줄게. 네 비밀도 말해줘. 엄마가 딴 아저씨랑 뽀뽀하는 걸 봤는데 엄마 얼굴이 새빨개졌어. 네 차례야.” (데이지)

“나 사실 안 늙었어.”(벤자민)

“어쩐지. 늙은 사람 안 같아. 할머니랑 달라.” (데이지)

“당연하지.” (벤자민)

“아픈 거야?” (데이지)

“엄마랑 티지 아저씨가 속삭이는 걸 들었는데 난 금방 죽을 거래. 그치만...아닐 수도 있고...” (벤자민)

“넌 이상해. 다른 사람들하곤 완전히 달라. 만져봐도 돼?” (데이지)

“응.”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의 주름 가득한 노인 얼굴을 손으로 다정하게 만졌다.

 

풀러 할머니는 손녀 데이지가 벤자민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더니 화를 냈다.

“같이 놀면 안 돼. 벤자민, 넌 부끄러운 줄 알아라.” (풀러 할머니)

 

의기소침해진 벤자민을 퀴니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타이르며 위로했다.

“넌 남들과 달라. 어른 몸에 갇혀 있지. 사람들이 그걸 이해 못할 뿐이야.” (퀴니)

“난 왜 이렇게 태어났어?” (벤자민)

“이리 와. 다 주님의 뜻이란다.” (퀴니)

 

불임이었던 퀴니가 티지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낳으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벤자민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벤자민은 양로원에 새로 입소한 할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중요한 건 잘 치는 것보단 음악을 느끼는 거야. 같이 해보자. 느낌을 담아서 연주해.”

 

시간이 흘러 벤자민은 이제 퀴니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목욕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음을 실감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풀러 할머니 말처럼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는 것처럼 벤자민은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었다.

 

항구에 나가 강을 오르내리는 배를 구경하다가 승선해서 일도 하게 됐다.

“잡부 하나 필요해. 일당 2달러인데 관심 있는 사람?” (마이크 선장)

배의 선장 마이크는 벤자민을 데리고 유흥가에 갔고 돈벌이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남들 말엔 신경 끄고 네 꿈을 쫓아.” (마이크 선장)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벤자민에게 낯선 남자가 타고 있던 차를 세우며 제안을 했다.

“날씨가 나쁜데 가는 곳까지 태워줘도 되겠소?”

“친절하시군요.” (벤자민)

차에 올라탄 벤자민에게 남자가 자기 소개를 했다.

“토마스 버튼이오.” (토마스)

“벤자민입니다.” (벤자민)

남자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사색에 빠진 표정으로 인사를 전했다.

“벤자민, 만나서 반갑소! 술 한 잔 하겠소?” (토마스)

“그러죠.” (벤자민)

 

벤자민은 토마스 덕분에 난생 처음 술집에서 술을 마시게 됐다.

“오늘 처음인게 많아요. 인생에도 때가 있나 봐요.” (벤자민)

“맞소. 무례하긴 싫지만...손이 아프시오?” (토마스)

“병을 갖고 태어났어요.” (벤자민)

“무슨 병을?” (토마스)

“늙은이로 태어났죠.” (벤자민)

“안됐군요.” (토마스)

“아뇨. 늙은 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벤자민)

“아주 오래 전에 아내를 잃었어요. 아이를 낳다가......” (토마스)

“안됐군요. 토마스 씨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벤자민)

“버튼 공장을 운영하죠. 못 만드는 단추가 없소. 지퍼 만드는 굿리치가 경쟁사이고... 당신은 무슨 일을 해요?” (토마스)

“예인선에서 일해요.” (벤자민)

 

토마스는 벤자민을 양로원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오늘 대화 즐거웠소.” (토마스)

“저도 술 즐거웠습니다.” (벤자민)

“가끔씩 안부 전하러 들러도 괜찮겠소?” (토마스)

“언제든지요. 잘 가세요, 토마스 씨.” (벤자민)

 

벤자민의 체력이 점점 더 좋아지듯이 코흘리개 어린애였던 데이지도 어느 틈에 훌쩍 소녀로 컸다. 벤자민은 데이지가 주말마다 양로원을 찾아오는 게 정말 좋았다.

 

벤자민은 풀러 할머니 몰래 데이지와 함께 양로원을 빠져 나와 자신이 일하는 예인선을 타고 강에 갔다. 데이지가 예인선 옆을 지나가던 크고 화려한 유람선을 부러워했다.

“우리도 유람선 탔으면 좋겠다.” (데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게 빠르게 변해갔다. 벤자민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던 할머니는 손수 그의 이발도 해주며 의아해했다.

“참 별일이네. 머리 숱이 많아졌어.” (할머니)

“사람들이 점점 늙어갈수록 난 점점 젊어진다면요?” (벤자민)

“그렇담...슬픈 일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야 하잖아. 끔찍한 책임이지. 삶과 죽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벤자민,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는 법이야.” (할머니)

벤자민은 할머니의 말을 심각하게 경청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고스란히 목격하면서 혼자만 계속 살아남는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최악의 재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벤자민에게 피아노와 그리움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던 할머니도 어느 가을날 세상을 떠나셨다.

 

1936년 벤자민은 17살이 됐고, 짐가방을 꾸려 작별 인사를 나누며 양로원을 떠났다. 엄마가 돼 주었던 퀴니는 울면서 뜨겁게 포옹해 주었고, 티지 아저씨는 “행운을 빈다.”고 격려해 주었다.

“사랑해요, 엄마.” (벤자민)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데이지가 뛰어왔다.

“벤자민, 어디로 가?” (데이지)

“바다로. 엽서 보낼게.” (벤자민)

“어딜 가든지 꼭 엽서 보내.” (데이지)

 

벤자민은 세상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정말로 데이지에게 엽서를 보냈다. 뉴파운드랜드, 배핀 베이, 글래스고, 리버풀, 나르비크 등... 마이크 선장과 함께 길을 떠났다. 마이크 선장이 큰 회사와 계약을 맺어서 배에 새 디젤 엔진과 장비를 달고 대서양을 누볐다. 마이크 선장과 벤자민, 주방장 프렌티스, 쌍둥이 형제인 릭과 빅, 매사에 부정적인 존 그림, 과묵하고 혼잣말을 잘 하는 커티스까지 서로 출신 배경과 성격이 제각각인 7명이 함께 배를 타고 함께 일을 하고 길을 떠났다.

 

데이지 역시 벤자민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뉴욕에 있는 발레 학교 오디션 합격과 발레단 무용수가 된 소식을 알렸다.

 

마이크 선장 눈에도 벤자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지고 있었다.

“벤자민, 처음 만났을 땐 곧 관 속에 들어갈 사람 같았는데... 요즘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자네가 더 젊어진 것 같아. 비결이 뭐야?” (마이크 선장)

“선장님이 폭음하는 게 문제죠.” (벤자민)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 벤자민 일행은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도착해 ‘겨울 궁전’이라는 호텔에서 묵게 됐다. 호텔 안 술집에는 언어, 피부색은 달랐지만 술독에 빠져 사는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벤자민은 호텔의 같은 층에 투숙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애봇이라는 유부녀를 알게 됐다. 남편 월터 애봇은 러시아 무르만스크 주재 영국 무역 대표부 대표였지만, 동시에 스파이이기도 했다. 벤자민은 엘리자베스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백지처럼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지만 내 눈엔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벤자민)

 

어느 날 밤 잠이 안 와서 호텔 로비로 내려간 벤자민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우연히 만나 함께 차를 마시게 됐다.

“뱃사람이죠?” (엘리자베스)

“선원이요.” (벤자민)

“무례한 질문 같지만...배 타기엔 나이가 좀 많지 않나요?” (엘리자베스)

“나이 제한 없어요. 일만 잘하면 되죠.” (벤자민)

 

“우리 아버진 80살이 되자 잠들면 죽는다고 밤엔 안 자고 낮잠만 주무셨어요. 그럼 안 죽을 거라면서요.”(엘리자베스)

“그래서요? 잠자다 죽었어요?”(벤자민)

“좋아하시던 의자에 앉아 돌아가셨죠. 좋아하시던 라디오 프로 들으시면서.” (엘리자베스)

“죽음을 예감했군요.” (벤자민)

“남편 따라 여기로 온 지 14개월이나 됐어요.” (엘리자베스)

“맙소사.”(벤자민)

“베이징으로 가려고 했는데 잘 안 됐죠. 동양에 가 봤어요?” (엘리자베스)

“아뇨, 안 가 봤어요. 외국에 가도 항구에만 있었고.” (벤자민)

 

엘리자베스는 벤자민에게 자신의 세상 경험을 들려 주었고,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의 방으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매일 밤 한밤중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 격의없는 대화를 함께 나누는 동안 세상은 평온했고 마음은 편안했다.

“오해하진 말아요. 그게, 보통은 유부녀가 낯선 남자하고 호텔에서 밤새 수다 떨진 않잖아요.”(엘리자베스)

“유부녀라고 해서 선입견은 없어요. 잘 자요.” (벤자민)

 

“다시 젊어진다면 바꾸고 싶은 게 많아요. 실수도 바로잡고요. 기다리기만 했어요, 뭔가를 할 수 있는 때가 저절로 찾아올 거란 환상을 갖고 젊은 시절을 허비해 버렸죠. 헛살았어요. 우리가 연인이 되면 낮엔 날 쳐다보지 마요. 해뜨기 전엔 헤어져야 하고 사랑한단 말은 절대 금지예요. 그게 규칙이에요.” (엘리자베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굳이 과거를 되돌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젊음을 낭비했던 기억은 두고두고 아깝다. 다시 돌아간다면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그건 어디까지나 늙은 지금의 공허한 미련과 욕심인 거지!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누군가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어.” (벤자민)

엘리자베스가 그를 사랑해 준 첫 번째 여자였고, 행복했다고 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벤자민이 로비에서 밤새 엘리자베스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일본의 공습 소식이 흘러나왔다.

“어제 1941년 12월 7일은 치욕적인 날입니다. 일본군이 미국을 공격했습니다.”

 

마이크 선장이 일행을 소집했고 비장하게 말했다.

“중요한 결정을 하려고 모이라고 한 거야. 미래가 걸렸지. 계획을 바꿨어. 알지 모르지만 어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어. 국민 된 도리로서 가만있을 수 없지. 우리 예인선이 해군에 징발됐어. 전함 수리, 예인, 구조 임무를 맡는 거지. 빠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말해. 배에 타는 순간 해군에 입대하는 거야.” (마이크 선장)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마누라가 아파요.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 (주방장 프렌티스)

“망설일 거 없어. 집으로 돌아가.”(마이크 선장)

“요리는 누가 해요?”

“바다에선 식중독이 사망 원인 2위야. 안전 사고가 1위고.” (존 그림)

“제가 할게요. 저, 요리 잘해요.” (벤자민)

“글쎄, 전쟁에 나가긴 좀 늙었는데... 까짓거! 일본놈들 때려 잡는데 나이 제한 있나! 전부 짐 챙겨. 일본군 잡으러 간다!” (마이크 선장)

 

벤자민은 짐을 챙기러 호텔 방문을 열었다가 바닥에 놓여있는 엘리자베스의 쪽지를 보았다.

“당신을 만나 좋았어요.”가 전부였다.

 

전쟁은 기대와 달랐다. 벤자민 일행은 파괴된 전함을 예인해서 해체했다. 전쟁이라고 하지만 아직 실감할 순 없었다. 해군이 그들의 배로 포수 데니스를 지원병으로 보내주었는데, 그는 미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의 전형이었다.

“미국만큼 자유가 보장된 나라는 없어요. 젊은이들이 양심을 들먹이며 징병을 기피하면 누가 조국을 지켜요?” (데니스)

 

불안한 앞날을 예감했는지 동료 커티스는 그동안 단 한 푼도 안 쓰고 꼬박꼬박 모아놓은 월급 뭉치를 벤자민에게 맡겼다.

“쭉 지켜봤는데 자넨 믿을만해. 내가 잘못되면 이걸 아내한테 전해줄래? 사랑했다고 전해줘.” (커티스)

 

전쟁이 마침내 벤자민 일행에게도 실감나게 다가왔다. 바닷가 저편의 풍경은 뜨거운 화염에 불타 오르며 아수라장이었다.

“갑판에 집합! 꾸물대지 말고 빨리!” (마이크 선장)

 

1,300명을 태우고 가던 수송선이 격침됐고 벤자민 일행의 배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바다 위에는 시체들이 둥둥 떠 있었고, 생존자는 없었다. 충격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거대한 잠수함이 그들의 배를 공격하기 위해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도망치긴 글렀어. 전투 위치로! ”(마이크 선장)

잠수함으로부터 벤자민 일행을 향해 무지막지한 총격이 속사포로 쏟아졌고 마이크 선장과 동료들이 총격을 입고 쓰러졌다. 거대한 잠수함은 그대로 돌진해 배에 충돌했다.

벤자민은 치명상을 입은 마이크 선장에게 달려왔다.

“손 잡아줘.” (마이크 선장)

벤자민은 선장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천국이 선장님을 기다리잖아요.”(벤자민)

“현실이 싫으면 미친 개처럼 날뛰거나 욕을 하고 신을 저주해도 돼.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받아들여야 해.” (마이크 선장)

 

의연한 죽음의 자세가 멋졌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꿋꿋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배려이지 않나 싶다!

 

그 날, 마이크 선장 뿐만 아니라 1,328명의 다른 생명들도 전쟁으로 인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애국자였던 군인 데니스, 동료인 커티스, 바다에서 죽을 거라던 존, 쌍둥이 중 한 명인 빅도 목숨을 잃었다. 벤자민은 커티스 아내한테 약속대로 월급 뭉치를 보냈다. 보험판매원, 변호사, 의사 혹은 인디언 추장이 되고픈 꿈을 가졌던 그 사람들이 모두 벤자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45년 5월 벤자민의 나이 25살 때, 그는 드디어 고향 집인 양로원으로 돌아갔다. 엄마 퀴니는 항상 그랬듯이 익숙하게 노인들을 위해 식사 테이블을 준비하고 있었다.

“퀴니!” (벤자민)

“네!” (퀴니)

퀴니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대답했고, 금세 벤자민을 알아보고 달려와 반갑고 감격스럽게 포옹했다.

“세상에!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얼굴 좀 보자!” (퀴니)

 

퀴니는 벤자민이 예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놀랐다.

“좀 돌아봐. 다시 태어난 거 같네. 몰라보게 젊어졌어. 옛날에 그 목사님이 기적을 일으킨 거야. 특별한 아이란 걸 난 첫눈에 알았지. 엄마 무릎 나갔어. 밤마다 무릎 꿇고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했거든. 엄마 말 기억나?” (퀴니)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벤자민)

“그렇지, 앉아. 세상 유람하면서 많은 걸 배웠니?”(퀴니)

“많은 걸 봤죠...” (벤자민)

“고통을 봤구나... 재미도 봤어?” (퀴니)

“그럼요!” (벤자민)

“그럼, 된 거야, 우리 아들.”(퀴니)

“티지 아저씨는요?” (벤자민)

“...4월에 먼저 세상을 떴다.” (퀴니)

“죄송해요.” (벤자민)

“괜찮아. 양로원엔 한두 명만 빼곤 전부 다 새로 오신 분들이야. 저 세상 갈 날만 기다리고 있지..... 정말 잘 돌아왔다. 이제 결혼하고 일자리도 잡아. 와서 좀 도와주렴.” (벤자민)

 

집은 영원한 안식처라고 했던가. 예전의 모습, 냄새, 느낌 다 그대로였다. 바뀐 거라곤 벤자민 자신뿐이었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안 지난 어느 날 아침. 유리창 밖으로 막 택시에서 내린 데이지가 양로원에 들어서는 모습을 봤고, 벤자민은 서둘러 데이지에게로 향했다. 데이지는 예전보다 훨씬 젊어진 벤자민을 알아보지 못했다.

“실례하지만, 퀴니 아줌마 계세요?” (데이지)

“데이지! 나야, 벤자민.” (벤자민)

“벤자민? 어쩜, 세상에! 정말 너구나, 벤자민!” (데이지)

데이지는 뒤늦게 알아보고 퀴니처럼 달려와 반갑게 포옹했다.

“어떻게 지냈어? 너무 오랜만이다. 언제 돌아왔어?” (데이지)

“몇 주 됐어.” (벤자민)

“전쟁에 나갔다고 아줌마한테 들었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데이지)

“난 괜찮아. 그나저나 보기 좋은 걸. 예뻐졌네!” (벤자민)

“왜 편지 멈췄어?” (데이지)

벤자민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 소녀였던 데이지가 이제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음을 알았다.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녀로.

“우리 할머니 기억해? 돌아가셨어.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운명이 틀림없어. 아니, 뭐라더라. 숙명! 유명한 점술가 케이시 알아? 그는 인간사가 미리 정해진댔는데 난 운명으로 여기고 싶어.” (데이지)

“운명이든 우연이든 만나서 기뻐.” (벤자민)

“맨해튼 가봤어? 난 강 건너편에 살아. 침대 위에 서면 엠파이어 빌딩도 보여. 어딜 가봤어? 전부 말해줘. 마지막 엽서 보냈던 게 러시아였잖아. 나도 러시아 가고 싶어. 사람들 말처럼 추워?” (데이지)

“두 배는 더 추워.” (벤자민)

“맙소사! 사람들 말처럼 넌 정말 다른 거 같아. 여자를 만났다면서, 어떻게 됐어?” (데이지)

“금방 끝났어. 저녁 먹으러 갈래?” (벤자민)

 

벤자민은 데이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레스토랑에 갔다.

“발란신 무용단에 들어간 거 말했나? 유명한 안무가인데 내 바디라인이 좋대. 한 번은 연습 중에 단원이 쓰러졌는데 그걸 즉흥적으로 안무에 넣더라니까. 극중에서 댄서가 일부러 넘어진 것처럼. 요샌 실험적인 무용이 대세야. 발레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렸어. 형식보단 댄서의 느낌을 중시하지.”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발레리나로서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전해 주었다. 하지만, 데이지가 말해준 새로운 세상은 사실 벤자민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에 그다지 귀담아 들을 순 없었다.

“이런...나만 떠들었네...담배 한 대만!” (데이지)

“담배 피우는지 몰랐네...” (벤자민)

“어른이잖아. 어른들이 하는 건 다 하는 걸. 뉴욕에선 밤새 즐기고 빌딩 너머로 뜨는 해를 구경해. 잠들지 않는 도시야. 나, 내일 돌아가.” (데이지)

“벌써?” (벤자민)

“더 있고 싶은데... D.H. 로렌스 책 읽어봤어?” (데이지)

“출판 금지 됐는데...” (벤자민)

“글들이 마치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아.” (데이지)

 

재회한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했지만, 벤자민은 주저했다.

‘우리의 삶은 기회로 결정된다. 놓쳐버린 기회에 의해서도...’ (벤자민)

지금 나에게 다가온 기회가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절호의 기회일수록 때론 크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벤자민은 점점 더 변해갔다. 이제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났고 후각과 청력은 훨씬 더 예민해졌다. 걸음걸이도 빨라졌으며, 남들이 늙어가는 동안 오직 벤자민만이 신기하게도 거꾸로 더욱 젊어졌다.

 

예전 그 때 빗길을 홀로 걷던 벤자민에게 술을 사 주고, 집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던 토마스 버튼 씨가 한 쪽 다리에 목발을 짚고 찾아왔다.

“벤자민, 나를 기억하나?” (토마스)

“그럼요, 버튼 씨. 목발은 왜?” (벤자민)

“발에 염증이 나서...” (토마스)

 

오랜만에 만난 토마스와 벤자민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아직도 위스키 칵테일을 드시는군요.” (벤자민)

“습관이야. 지금은 흥미로운 시대야. 하루에 단추를 50만개씩 만들어. 직원을 10배로 늘렸고 24시간 생산하지. 전쟁 덕분에 우리 사업이 호황이야...”(토마스)

 

근황을 얘기하는가 싶던 토마스 씨가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난 죽어가고 있네... 얼마 못 살아...” (토마스)

“유감이군요...” (벤자민)

“난...친척이 없어. 항상 혼자지. 시간 날 때 집에 한 번 찾아오게.” (토마스)

“그럴게요. (벤자민)

 

식사를 마친 후, 토마스는 벤자민을 자신의 회사로 데려가 구경시켜주며 자세하게 설명했다.

“버튼에 대해 좀 아나? 124년간 이어진 우리 가문 가업이야. 작은 양복점을 하던 할아버지가 남북전쟁 직후 뉴올리언스에 왔고 그 때부터 아버지가 버튼을 만들었는데 덕분에 작은 양복점이 이렇게 큰 회사가 됐네. 난 바느질도 못 하지만...” (토마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크게 성공하셨군요.” (벤자민)

 

벤자민은 토마스 씨에게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짐작이 들었다.

“그런데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뭐죠?” (벤자민)

 

그러자, 토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벤자민...넌...내 아들이야!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구나... 넌 1차 대전 종전일에 태어났다. 네 엄마는 널 낳다가 돌아가셨지. 난 널 괴물로 생각했다. 네 엄마한테 널 잘 돌보겠다 했지만...... 널 버리지 말았어야 했어...” (토마스)

 

토마스는 호숫가 여름 별장에서 찍었던 가족 사진이며, 결혼 사진 등을 보여 주었다.

“네 엄마의 이름은 캐롤라인 머피. 할아버지 댁 주방에서 일했는데 아일랜드 태생으로 1903년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와 뉴올리언스에 정착했어. 난 네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어. 1918년 4월 25일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그 날 네 엄마와 결혼했지.” (토마스)

 

내내 버림받았다가 친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져서야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고, 그제서야 존재를 인정받게 된 자식의 심정은 어떨까?

“왜 진작 말하지 않았죠?” (벤자민)

“내 전 재산을 너한테 남길 거야.” (토마스)

 

벤자민은 돌아섰다.

“갈게요.” (벤자민)

“어디로?” (토마스)

“집에요.” (벤자민)

벤자민은 양로원으로 돌아갔다.

 

퀴니는 벤자민의 얘기를 듣고 분노했다.

“그렇게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면 반겨줄지 알았대? 웃기지 말라고 해! 하나님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달랑 18달러를 담요에 넣어놨더라. 18달러랑 더러운 기저귀......” (퀴니)

 

7번이나 번개를 맞고도 살아남은 양로원 노인이 벤자민을 보고 말했다.

“한 쪽 눈은 멀고, 잘 듣지도 못해.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하려던 말도 자꾸 까먹어. 그렇지만 알아? 이렇게 살아있는 걸 하나님께 감사한다.”

 

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벤자민은 밤 늦게 다시 토마스를 찾아갔다. 잠들어 있는 토마스를 깨워 바닷가 일출을 마지막으로 함께 보았다. 마이크 선장의 말을 기억했다.

“현실이 싫으면 미친 개처럼 날뛰거나 욕을 하고 신을 저주해도 되지만 마지막 순간에 받아들여야 한다.” (마이크 선장의 말)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친아버지의 죽음을 냉정하게 외면할 순 없지 않았을까.

 

갓난아기 벤자민을 버린 것에 대해 분노했던 퀴니 역시 토마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벤자민을 위로했다. 어쨌거나 자신의 아들로 키운 벤자민의 친부가 아니던가!

“근사한 장례식이야. 네 엄마 곁에 묻히실 거다.” (퀴니)

“내 어머니는 당신이세요.” (벤자민)

“내 아들!” (퀴니)

 

친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후, 벤자민은 꽃다발을 들고 뉴욕에 있는 데이지의 발레 공연장을 찾았다.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설 용기가 이제 드디어 생겼나 보다!

“벤자민, 여긴 웬일이야?” (데이지)

“널 만나고 싶어서.” (벤자민)

“미리 연락하지. 깜짝 놀랬잖아.” (데이지)

“너한테서 눈을 못 떼겠더라. 환상적이었어.” (벤자민)

“고마워. 칭찬 들으니까 좋네.” (데이지)

 

데이지는 공연 뒷풀이에 벤자민을 데려갔다. 그리고 함께 공연하는 남자 단원 데이빗을 소개했다.

“데이지 할머니랑 친구라던가, 뭐 그랬죠?” (데이빗)

 

벤자민은 데이지가 데이빗과 다정하게 키스하며 단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에 안타깝게도 소외감을 느끼며 혼자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서둘러 그를 불러 세운 데이지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올 걸 몰랐잖아. 젠장! 벤자민. 뭘 기대한 거야? 만사 제쳐두고 널 반겨주라고? 나도 내 삶이 있어.” (데이지)

“자기야, 안 가?” (데이빗)

“벤자민, 같이 가자. 음악도 좋고, 다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같이 어울리길 권했다.

 

“내 잘못이야. 연락했어야 했어. 그냥 찾아오면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벤자민)

“데이지, 빨리 가자.” (데이빗)

“좋은 사람 같아. 사랑해?” (벤자민)

“그런 거 같아.” (데이지)

 

서로 어긋난 타이밍이었다.

“잘 됐어. 고향에서 보자.” (벤자민)

“그래...” (데이지)

 

데이지는 기다리는 일행들을 향해 돌아섰고, 공연 잘 보았다는 벤자민의 인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묻혀 버렸다. 어긋난 타이밍! 사실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뒤늦게 알게 된 친아버지 토마스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털어놓고 싶었다.

 

23살 데이지는 한창 잘 나가는 댄서로서 5년 동안 런던, 비엔나, 프라하...전 세계를 돌며 열정적으로 공연을 했다. 하지만, 벤자민을 잊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시간이 서로 엄연히 다르게 따로 흐를지라도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큼은 별 차이가 없었다. 타이밍은 어긋났어도 마음만큼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을 거꾸로 사는 벤자민은 이제 오토바이를 능수능란하게 타고 다니는 젊은 청년이 됐다.

‘삶은 단순했고 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벤자민)

‘우린 살아가면서 끝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우연이든 고의든 그걸 막을 방법은 없다. 삶은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의 연속이다. 누구든 통제할 수 없다.’ (벤자민)

 

벤자민은 갑작스런 교통 사고를 당해 다리가 으스러진 데이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 파리까지 날아갔다.

“데이지...” (벤자민)

“누가 알려줬어?” (데이지)

“네 친구가 전보로 알려줬어.” (벤자민)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지만 난 괜찮아.” (데이지)

데이지는 난처해 했다.

“너라도 왔을 거야.” (벤자민)

 

이제는 멋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벤자민을 보고 데이지는 놀랐다.

“어머나! 벤자민, 네 모습을 봐, 완벽해.” (데이지)

멋진 벤자민에게 흉하고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들키기 싫었다.

“오지 말지 그랬어. 이런 모습은 보이기 싫어.” (데이지)

데이지의 다리뼈는 5조각이 났고, 장기간 치료를 받으면 걸을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춤은 앞으로 더 이상 못 추게 되고 말았다.

 

“나랑 집에 가자. 내가 돌봐줄게.” (벤자민)

“뉴올리언스에는 안 가.” (데이지)

“그럼 내가 파리에 있을게.” (벤자민)

“모르겠어? 네 도움 필요 없어. 이런 꼴 됐다고 너랑 사귀긴 싫어. 뉴욕에서 말했잖아. 왜 듣질 않아?” (데이지)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벤자민)

“우린 더 이상 애들이 아냐. 제발... 내 삶에서 사라져줘.” (데이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도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여자의 심리는? 화성에서 온 남자 VS 금성에서 온 여자!!!

상심한 데이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벤자민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잔인하게 굴었던 데이지를 벤자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벤자민은 바로 떠나지 않고 계속 파리에 머물며 데이지 곁을 맴돌았지만 정작 그녀는 몰랐다.

 

데이지는 회복해서 다시 걷게 됐을 때, 파리를 떠나 기차를 타고 프랑스 남부로 갔다. 고향으로 돌아간 벤자민은 보트 조종법을 배워 친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보트를 타고 항해에 나섰으며, 두세 명의 여성을 사귀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 봄 이윽고 데이지도 고향에 돌아왔다. 퀴니는 벤자민에게 그랬듯이 엄마처럼 포근하고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그동안 왜 편지 한 번 안 했어? 죽은 사람 마냥...” (퀴니)

“혼자 생각 좀 하고 싶었어요.” (데이지)

“널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내가 안 틀렸길 바라마.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거든. 좋은 시간 보내렴.” (퀴니)

퀴니는 엄마답게 벤자민과 데이지의 사이를 진작부터 알았나보다.

 

벤자민은 데이지와 함께 보트를 타고 플로리다 키스제도 연안을 항해했다. 드디어 두 사람의 시간이 어긋나지 않고 만났다.

“26살 때 연인이 안 된 게 참 다행이야. 난 너무 젊었었고 자긴 너무 늙었었어. 지금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봐.” (데이지)

“자기와 있는 매 순간을 소중히 보낼 거야.” (벤자민)

 

함께 행복한 동안, 데이지는 자연스럽게 늙어갔고 벤자민은 계속 점점 더 젊어졌다.

“자긴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데 난 주름 투성이야. 불공평해.” (데이지)

“난 자기 주름이 좋아. 많지도 않지만.” (벤자민)

“젊어지는 기분이 어때?” (데이지)

“잘 모르겠어. 나도 못 믿겠거든.” (벤자민)

“내 피부가 늘어져도 사랑해줄 거야?” (데이지)

“내가 여드름 생겨도 사랑해줄 거야? 이불에 오줌을 싸도? 어둠이 무섭다고 울어도?” (벤자민)

“무슨 생각해?” (데이지)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 정말 슬픈 일이지.” (벤자민)

“영원한 것도 있어.” (데이지)

데이지가 할머니가 되면 벤자민은 갓난 아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항해에서 돌아온 벤자민과 데이지는 퀴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벤자민은 퀴니를 티지 아저씨 곁에 묻고, 친아버지의 집을 팔아 데이지와 둘만의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데이지는 그 집을 참 마음에 들어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이웃인 반담 부인은 물리치료사였고, 집 근처엔 수영장이 있었다. 수영을 즐기던 데이지는 활기가 넘치는 젊은 여성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상심에 빠졌다.

“사고가 안 났으면 좀 더 활동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무용가라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순 없는 거야. 사고가 안 났어도 당신은 지금 여기 있었을 거야.” (벤자민)

“늙어가는 게 너무 싫어.” (데이지)

 

벤자민은 친아버지와 함께 감상했던 일출 명당 바닷가 벤치에 데이지와 나란히 앉아 일몰 풍경을 바라보았다.

“미련 따윈 버릴게. 약속해. (데이지)

벤자민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은 거다. 영원히 완벽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벤자민의 혼잣말)

 

데이지는 안정을 찾았고, 댄스 스쿨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발레를 가르쳤다.

 

“당신은 1918년에 태어났으니까 49살이고, 난 43살이니까 나이가 비슷해졌네. 또 달라지겠지만...” (데이지)

“이제야 서로 맞는 것 같아. 지금 이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벤자민)

 

데이지는 벤자민에게 폭탄 고백을 했다.

“나 임신했어. 간호사가 아들이란 암시를 했는데 내 생각엔 딸 같아. 걱정 하는 거 알아.” (데이지)

“걱정 돼.” (벤자민)

“뭐가 제일 걱정돼?” (데이지)

“나처럼 태어날까봐.” (벤자민)

“그럼 더 사랑할 거야. (데이지)

“난 점점 더 어려질 텐데 어떻게 아빠 역할을 해? 아이한테 불공평해.” (벤자민)

“누구든 늙으면 기저귀를 차게 돼. 내가 잘할게. 당신과 같이 가정을 꾸리고 싶어.” (데이지)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주고 싶지만...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문제라...” (벤자민)

“병 있다고 자식 못 가져? 당신도 얼마든지 아빠가 될 수 있어. 힘들 걸 알면서도 아기를 가진 거야. 당신을 사랑하니까. 화장실 다녀올게.” (데이지)

 

벤자민은 데이지가 화장실 간 사이, 식당 안 TV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들었다.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넌 최고령 여성, 34시간 22분 14초입니다. 올해 68세인 엘리자베스 애봇씨가 그 주인공이죠. 부인, 소감 한마디만 부탁합니다.” (리포터)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요.”(엘리자베스)

러시아 호텔에서 만났던 바로 그 엘리자베스가 젊은 시절 꿈을 68세에 드디어 이룬 걸 보고 벤자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데이지도 엘리자베스도 참 대단한 그녀들이다. 심각한 불치병이 유전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데이지도,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을 포기하지 않고 70세가 다 돼 기어히 이루어낸 엘리자베스도 참 대단한 그녀들이다. 어쩌면 한없이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었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는 선택을 피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봄날, 데이지가 드디어 출산했다. 걱정에 노심초사했던 벤자민은 산모와 딸 모두 건강하다는 의사 말에 안도했다. 2.4kg의 건강한 딸이었다. 벤자민은 딸에게 친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캐롤라인이라 지었다.

 

캐롤라인은 계속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성장했다.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캐롤라인을 잘 키워줄 진짜 아빠를 찾아.” (벤자민)

“무슨 소리야?” (데이지)

“같이 늙어갈 아빠.” (벤자민)

“당신이 어떻게 되든 사랑할거야.” (데이지)

“필요한 건 아빠지 소꿉 친구가 아냐.” (벤자민)

“내가 싫어졌어? 내가 너무 늙어서?” (데이지)

“그런 거 아냐. 당신 혼자 아기 둘을 키울 순 없어.” (벤자민)

그랬다. 데이지는 늙어가고 캐롤라인은 무럭무럭 자랄 테고 벤자민은 갓난 아기가 될 것이다. 데이지는 딸 캐롤라인을 키우면서 동시에 갓난 아기로 죽어가는 남편 벤자민을 보살펴야 한다. 벤자민은 데이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무게의 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딸 캐롤라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과 고통이기도 하다.

 

어느덧 캐롤라인의 첫 번째 생일 파티를 했고 집안은 애들로 가득했다.

“눈 깜짝할 새 고등학생이 될 거요. 연애도 하고...” (파티 참석한 남자가 벤자민에게)

 

벤자민은 친아버지가 물려주었던 호숫가 여름 별장, 버튼 공장, 보트를 판 돈을 모두 정리해 은행에 넣어두었다. 데이지와 딸 캐롤라인이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딸이 자기를 기억할 만큼 자라기 전에 서둘러 두 사람 곁을 떠났다. 빈손으로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소중한 두 사람 곁을 억지로 떠나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혼자가 된 그는 살아가는 내내 얼마나 외롭고 그리워할까???

 

벤자민은 떠나서도 딸에게 계속 엽서를 보내왔고, 그 안에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고스란히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1970년 2살 생일 축하해!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 싶구나.”

“5살, 학교 입학식에 널 데려가고 싶구나.”

“6살, 네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구나!”

“1981년 13살, 남자애를 쫓아 다닌다면 말리고 싶구나. 네가 슬퍼할 땐 안아주고 싶어. 아빠 노릇을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텐데...”

 

인도로 배낭 여행을 가서 보낸 엽서에는 인생 선배이자 멘토로서 아낌없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살아가면서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건 없단다. 넌 뭐든지 될 수 있어. 꿈을 이루는데 시간 제한은 없단다. 지금처럼 살아도 되고 새 삶을 시작해도 돼. 최선과 최악의 선택 중 최선의 선택을 내리길 바라마. 네가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걸 느꼈으면 좋겠다. 너와는 다른,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조금이라도 후회가 생긴다면 용기를 내서 다시 시작하렴.” (벤자민)

 

그리움에 졌나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곁을 그렇게나 멀리 홀연 떠났던 벤자민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청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왜 돌아온 거야?”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을 보고 야속한 눈물을 흘렸고, 마침 딸 캐롤라인이 엄마를 부르며 다가왔다. 벤자민은 어느새 12살 소녀로 성장한 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캐롤라인에게 벤자민을 친아버지로 밝힐 수가 없어서 아는 지인으로 소개했다.

“캐롤라인, 벤자민 아저씨야. 네가 아기 때 본 적 있어.” (데이지)

“안녕!” (벤자민)

“여보!” (현재의 남편 로버트)

“가족이 잘 알던 친구예요, 벤자민 버튼! 이 쪽은 남편 로버트예요.” (데이지)

“안녕하시오!” (로버트)

 

남편 로버트는 벤자민에게 만나서 반가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캐롤라인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말 예쁘다. 엄마를 쏙 빼닮았어. 춤도 잘 춰?” (벤자민)

“별로야.” (데이지)

“그건 날 닮았나봐.” (벤자민)

“아주 착한 아이야. 좀 산만하긴 하지만. 12살 땐 다 그렇잖아. 아이를 볼 때마다 당신 생각이 나. 남편은 전 부인과 사별했는데 똑똑하고 자상한 사람이야. 모험심도 강하고 애한테 잘해줘.” (데이지)

“다행이군.” (벤자민)

“당신 더 젊어졌네!” (데이지)

“겉모습만 그래.” (벤자민)

“당신이 옳았어. 아기 둘은 못 키웠을 거야. 난 그렇게 강하질 않아. 어디서 지내?” (데이지)

“폰차트레인 호텔에 묵고 있어. 뭘 할진 모르겠고. 하지만......” (벤자민)

벤자민이 머뭇거리자, 데이지가 말했다.

“가족(남편과 딸)이 기다려.” (데이지)

데이지가 서둘러 가족에게 가버렸고, 우두커니 벤자민만 남았다.

 

호텔로 온 벤자민은 이제야 왜 돌아왔느냐는 데이지의 물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였다.

“괜찮아?” (벤자민)

“미안해. 왜 왔는지 모르겠어. 영원한 건 없어.” (데이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해.” (벤자민)

데이지는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갔고, 벤자민은 다시 멀어졌다.

 

무심한 세월이 또 흐르고 흘러 남편 로버트가 죽었고, 이제 어느덧 할머니가 된 데이지는 고향 양로원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아동복지과 직원이 버려진 건물에서 발견한 한 남자 아이의 배낭 안에 일기장 뭉텅이와 함께 데이지의 연락처가 있었다.

“아이 상태가 좋질 않아요. 자기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모르죠.” (아동복지과 직원)

 

데이지가 귀에 익숙한 피아노 연주 소리에 다가가 보니, 소년이 된 벤자민이었다.

“벤자민!” (데이지)

데이지가 벤자민에게 다가서려 하자, 아동복지과 직원이 조언했다.

“손 대면 싫어해요. 인지력이 떨어져요. 의사는 전형적인 치매 초기 증상이래요.” (아동복지과 직원)

벤자민은 몸만 소년이고, 정신은 치매 노인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벤자민, 나 누군지 알아보겠니? 데이지야.” (데이지)

“난 벤자민!” (벤자민)

“만나서 반갑구나, 벤자민. 옆에 앉아도 될까? 네 연주를 듣고 싶어.” (데이지)

“날 알아?” (벤자민)

 

데이지는 매일 양로원에 들러서 벤자민을 보살폈다.

“전부 못됐어! 거짓말하지 말란 말이야!” (벤자민)

금방 식사한 걸 잊어버린 벤자민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할머니랑 뭘하며 놀지 생각해볼까?” (데이지)

“내가 기억 못하는 게 많은 거 같아. 뭐랄까...오래 산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 안 나.” (벤자민)

“괜찮아. 기억 못해도 돼.” (데이지)

벤자민은 자기가 누군지, 어디 있는지 자주 잊어버렸다. 그런 벤자민을 보살피는 건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높디 높은 지붕 꼭대기 위에 위험한 줄도 모르고 올라가 앉아 있었다.

“여기선 전부 다 보여. 강도 보이고 엄마가 묻힌 묘지도 보여. 내가 날 수 있으면?” (벤자민)

“하늘을 나는 사람들을 알아. 내려오면 다 말해줄게.” (데이지)

 

데이지는 벤자민이 다섯 살로 어려졌을 때부턴 같이 살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벤자민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나이였다. 할아버지 외모의 벤자민이 다섯 살 데이지를 처음 만났었는데 지금은 할머니 데이지가 다섯 살 벤자민을 마주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벤자민은 걷는 법을 잃어버렸고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가 됐다. 몸만 갓난 아기이지 사실은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이었다.

 

2003년 봄, 포대기에 쌓인 갓난 아기 벤자민이 데이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데이지는 벤자민이 그녀를 알아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벤자민은 마치 잠이 들 듯이 데이지의 품 안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치매로 거의 모든 기억을 다 잃고 죽어 가면서도 끝내 필사적으로 붙잡고 지켰을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해.”라고 했던 벤자민의 진심!!!

 

벤자민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세월이 더 흘러 이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데이지는 병원 침대에 누워 딸 캐롤라인에게 벤자민의 일기장과 함께 그간의 모든 역사를 그제서야 털어 놓았다.

“아빠를 (더 빨리) 알았더라면...” (캐롤라인)

“이제 알잖니.” (데이지)

 

데이지는 왜 이렇게 늦게서야 딸에게 벤자민의 존재를 알린 걸까? 좀 더 일찍 알려 주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내가 캐롤라인이었다면 엄마가 많이 야속했을 것 같다. 엄마 평생의 사랑이자, 운명이었으며, 자신의 친아버지인 벤자민에 대해 엄마에게 궁금한 것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을 텐데 그 중요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허리케인으로 병원 내부에 울린 사이렌 소리를 듣고 캐롤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데이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을 만큼 최악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벤자민이었지만, 그는 원망이나 자기연민에 허우적거리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지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삶을 살았다.

 

앞으로, 우리 앞으로 계속 밀려들 시련의 파도가 또 얼마나 크고 높고 셀지……퀴니의 말처럼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부디 모쪼록 벤자민처럼 끝까지 뚜벅뚜벅 꿋꿋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사랑을 놓지 않고 지킬 수 있기를!!!

 

새해의 시작에 인생과 사랑, 책임을 되새기게 하는 영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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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틀리 폴라 베어 Infinitely Pola Bear>

2016/드라마

♣감독 : 마야 포베스

♣출연 : 마크 러팔로/조 샐다나/이모젠 월로다/애슐리 오프더하이드 등...

 

♣스포일러 있어요~^^

 

“우리 아빠는 1967년에 조울증 진단을 받았고, 가짜 수염을 붙이고 케임브리지 주변을 돌며 자기 자신을 하버드의 예수 요한이라고 불렀다. 상태가 나아지자 보스턴의 공영 방송국에 취직을 했고, 거기서 엄마를 만났다. 다짜고짜 엄마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첫 데이트 때 자동차로 뉴잉글랜드를 구경하며 신경쇠약 증세가 있다고 고백했지만, 그 시절엔 다들 그래서 엄마는 신경도 안 썼다. 주변의 절반은 반미치광이였으니까. 그렇게 두 분이 결혼해서 내가 태어났고 내 동생도 생겼다. 우린 행복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훨씬 복잡한 법이다. 늘 그렇듯이.” (아멜리아)

 

1978년.

“아빠, 우리는 학교 가야 해요.” (첫째 딸 아멜리아)

“오늘은 우리끼리 축하할 거야. 내가 해고됐거든.” (아빠 카메론)

“취직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아멜리아)

“주변을 좀 둘러봐. 아름다운 대자연을 만끽하는 거야.” (카메론)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멜리아)

“누가 먼저 트집 잡고 밀어부친 건지 모르지만 사장이랑 크게 한판 붙었어. 아무튼 버섯이나 따서 엄마 오믈렛 만들어주자.” (카메론)

“해고된 거 엄마도 알아요?” (아멜리아)

“환상적이지? 학교 빠진 거 알면 엄마도 좋아할 거야.” (카메론)

 

아내가 좋아할 리가!

“둘 다 차에 타.” (아내 매기)

매기는 화가 났다.

 

한겨울에 수영복 팬티 차림으로 벌거벗고서 담배 연기 폴폴 날리며 자전거 타고 쫓아온 카메론.

“매기,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그 가방은 뭐야?” (카메론)

“어서 타.” (매기)

두 딸을 차에 태운 매기는 서둘러 떠나려는데,

“매기, 나 괜찮아. 지극히 정상이라고! 카누는 내가 꺼내놨어. 링컨 공원까지 이고 가서 소풍을 즐길 거야.” (카메론)

 

“소풍 가기엔 너무 춥지 않나?” (큰 딸 아멜리아)

자전거를 냅다 내동댕이 치고, 팬티 차림으로 차량 주변을 맴돌며 소리 지르는 아빠 모습에 겁 먹은 아이들.

 

카메론은 기어히 차를 멈춰 세웠다.

 

“무서워 하지 마. 괜찮아.” (매기)

차 안에서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달래며 울음을 터뜨리는 매기. 그 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던 카메론은 “미안해.” 라고 사과하고, 멀찌감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영복 팬티만 입고 땅바닥에 앉아 있어요.” (큰 딸 아멜리아)

“아빠가 많이 아파서 이상해진 거야.”(매기)

“많이 추울 텐데.”(아멜리아)

 

어두컴컴한 저녁, 경찰에 끌려가는 카메론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어린 두 딸에게 엄마 매기가 당부했다.

“내 말 잘 들어.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는 이런 얘기 하지 마. 우린 아빠가 좋은 분이고 우릴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 하거든. 슬픈 일이지.” (매기)

 

그 길로 카메론은 보호시설에 들어가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됐다.

 

아빠에게 손편지를 쓰는 두 딸.

{사랑하는 아빠. 오늘 숲에 들어가서 작별인사를 했어요. 엄마가 차를 팔고 대신 간식을 사줬어요. 도시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기 싫어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콜릿을 뿌려서 먹었어요. 엄마는 우리의 보헤미아가 끝났다는데 아마 돈 버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을 담아 페이스 스튜어트, 아멜리아 스튜어트.}

 

매기는 두 딸을 데리고 보호시설을 찾아 남편을 면회했다.

“내 새끼들. 안녕!” 약 기운에 힘 없이 느려진 카메론의 목소리. 한 손에 들고 있는 건 아내에게 줄 꽃송이.

“아빠한테 가 봐. 가서 인사 드려.” (매기)

“꼬맹이랑 큰 꼬맹이.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 (카메론)

골초인 카메론은 대화 중에도 늘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

 

“아빠 배가 진짜 커요.” (아멜리아)

“의사들이 이 안에 약을 집어 넣었거든. 안 아프니까 쳐봐. 어서 때려봐.”

“기분은 어때?” (매기)

“가족들이랑 집에 가고 싶어.” (카메론)

“사랑해요.” (애들)

“나도 사랑해. 고맙다.” (카메론)

 

얼굴 잠깐 보기가 무섭게 돌아서는 아빠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족들. 그리고 6주 후가 됐다.

“밤에도 창문으로 옥상 조명이 다 보여요. 낮처럼 밝아서 잠이 안 온다구요.” (아멜리아)

“커튼 하나 사 줄게.” (매기)

“조명이 얼마나 큰데요. 교도소에서 쓰는 방범등 같아요.” (아멜리아)

“엄마도 시골이 더 좋지만 거긴 좋은 직장이 없어.”(매기)

“지금 직장도 별로잖아요.” (둘째 딸 페이스)

“더 나은 델 찾아야지.” (매기)

“아빠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돼요?” (아멜리아)

“아빠 만나러 보호시설 가기 싫어요. 거긴 병원보다 더 후져요.” (페이스)

“지금 병에서 회복하시는 중이잖아.”(매기)

“아빠가 엄마보다 요리도 훨씬 잘해요.” (페이스)

 

하교 길, 아멜리아는 우산도 없이 비옷만 입은 채 비를 쫄딱 맞고서 학교에서부터 터벅터벅 혼자 먼 길을 걸어 보호시설까지 아빠를 찾아갔다.

“여길 어떻게 왔어? 학교에서 걸어온 거야?” (카메론)

“아빠 계획은 뭐예요?” (아멜리아)

“계획이 뭐냐고? 내 계획은…일단 보호시설을 나가는 거야. 그리고 취직해서 아파트를 얻어야지. 그래서 우리 딸들이 아빠 집에 놀러 오면 아침 저녁으로 크레페를 만들어 주겠어. 그러다 가족이 다시 합치면 너랑 페이스랑 엄마랑 같이 사는 거지. 엄마가 날 받아준다면 말이야. ” (카메론)

카메론은 아멜리아의 젖은 옷을 말리고, 따뜻한 차와 음식을 내밀었다. 아멜리아는 희망찬 표정을 지었다.

“나니아 연대기의 톰누스 집에 온 거 같아요.” (아멜리아)

“여태 들어본 말 중 최고의 찬사인데!” (카메론)

“엄마는 아빠가 술 마시는 게 제일 큰 문제래요. 그러니까 술을 끊고 꾸준히 리튬을 복용하면 엄마도 받아줄 거에요.” (아멜리아)

“정말 엄마가 너한테 속마음을 털어놨다고?” (카메론)

“네.” (아멜리아)

“다시 나니아 연대기 놀이나 하면 안 될까?” (카메론)

 

카메론은 직장에서 근무 중인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멜리아가 오늘 나를 찾아왔어. 별일은 없었어. 내가 집으로 데려갈게.” (카메론)

 

모처럼 한집에 다 모인 가족들. 아멜리아는 피아노를 치고, 페이스도 미소 지으며 식탁 위에 꽃병을 올려두었다.

카메론은 주방에서 매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느 평범한 가정에서처럼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부모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긴 어떻게 갔대?” (매기)

“걸어서. 아무래도 심리치료를 받게 해야 할 것 같아.” (카메론)

 

부부는 아멜리아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한마음으로 아낌없이 칭찬했다.

“완전 감동이야!” (카메론)

“잘한다, 우리 딸!” (매기)

 

“일은 어때?” (카메론)

“그 놈의 일!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매기)

한숨을 짓는 매기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 카메론. 아멜리아가 즐거운 표정으로 불쑥 두 사람의 다정한 사이에 함께 끼어들었다.

“세탁물을 깜빡했네.” (매기)

“우리가 갈게요.”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동생 페이스와 함께 세탁물을 가지러 나섰다. 아이들은 모처럼만의 엄마 아빠 다정한 모습이 좋았다.

 

자매가 나란히 공용세탁실에서 세탁물 바구니를 챙겨오는 길, 계단 참에 앉아있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링컨 초등학교에 다니니?” (여자 아이)

“우린 피바디에 다녀.” (아멜리아)

“거긴 보스턴에서 제일 좋은 공립학교잖아. 여긴 피바디가 속한 학군이 아니야. 여기 사는 애들은 다 똥통 학교인 링컨에 다녀야 해.”(여자 아이)

“그리고 아일랜드 애들한테 매일 두들겨 맞고. ” (남자 아이)

“난 맞기 싫어.” (페이스)

“누군 좋아서 맞겠냐.” (남자 아이)

“아무튼 우린 피바디에 다녀.” (아멜리아)

“그러니까 그건 불법이야. 공평하지 않다고. 그런 짓을 했으니 너흰 감옥에 갈 거야.” (여자 아이)

 

가족이 다 모인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아멜리아가 하소연했다.

“집이 어디냐고 묻는데 거짓말하긴 싫어요.” (아멜리아)

“피바디는 보스턴에서 제일 좋은 공립 학교야.” (매기)

“그렇든 말든 거짓말은 싫어요.” (아멜리아)

“괜찮아, 네가 아니라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니까.” (카메론)

“링컨엔 가기 싫어요. 거기 애들은 맞고 다닌대요.” (페이스)

“아빠가 싸움의 기술을 전수해줄게.” (카메론)

“선생님이 눈치채면요?” (아멜리아)

“넌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이 예뻐하시잖아.” (매기)

“아일랜드 애들한테 두들겨 맞는대요.” (페이스)

“그런 일은…….” (매기)

아이들의 하소연 파노라마에 매기가 힘들어하자, 카메론은 막내 페이스를 향해 힘차게 윙크하며

“네가 다 접수해버려.” (카메론) 라고 격려했다.

 

“그렇게 우릴 피바디에 보내고 싶으면 그쪽 학군으로 이사 가면 되잖아요.” (아멜리아)

“우리 수준엔 무리야. 이 임대아파트라도 얻은 게 다행이지.” (매기)

“아빠네 집은 부자라면서요?”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짜증을 내자, 매기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우린 돈 없어. 매일 이력서를 보내도 답이 없고 마지막 남은 돈도 다 썼어. 그래도 너희들 교육만은 제대로 시키고 싶다고.” (매기)

 

모녀가 언쟁을 높이자 카메론은 슬그머니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후라이팬을 들고 와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더 먹을 사람?” (카메론)

“식사 준비해줘서 고마워.” (매기)

“매일 해줄 수도 있어.” (카메론)

“고맙지만 난 아내가 아닌 남편이 필요해.” (매기)

“남편이 되고 싶어도 아내가 거절하잖아.” (카메론)

“아내가 아내 역할만 할 수 있게 해줬어야지.” (매기)

“난 남편이고 싶지만 자기가 남편 역할을 하고 날 아내로 만들려고 했잖아.” (카메론)

 

매기는 아이들의 학교에 불려갔다.

“교장선생님이 뭐래요?” (아멜리아)

“우린 이 학교 학군에 살지 않으니까 너랑 페이스는 링컨으로 가야 한대.” (매기)

“엄마, 미안해요.” (아멜리라)

“괜찮아. 제발 울지 마. 미안할 거 없어.” (매기)

“어디 사냐고 묻는데 말문이 막혔다고요.” (아멜리아)

“거짓말 안 한 건 올바른 행동이야.” (매기)

“우리가 한 일은 불법이래요.” (아멜리아)

“나도 알지만…다 엄마 잘못이야. 너희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거든.” (매기)

“나 때문에 페이스가 맞고 다니면 어떡해요?” (아멜리아)

“페이스는 그런 애들을 다 할퀴고 다닐걸.” (매기)

 

드디어 카메론이 보호시설에서 퇴원해 따로 집을 마련했다.

“침낭, 잠옷, 인형, 책이랑 갈아입을 옷 또 뭐가 있지?” (카메론)

“칫솔!” (매기)

“애들 칫솔은 내가 미리 사뒀어. 나무 상자 두 개로 침대도 만들었는데 애들도 좋아할 거야.” (카메론)

“잔뜩 기대하고 있어.”(매기)

“낮에는 상자를 돌려서 인형극을 할 수도 있어.” (카메론)

“그거 정말 재미있겠다.” (매기)

“이제 내 집이 생겼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애들 데려다가 재울 수도 있어.” (카메론)

“고마워.”(매기)

“당신 방도 있어. 농담이야. 절대 강요는 안 해.” (카메론)

 

매기는 카메론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카메론! 나, 경영대학원에 합격했어.”(매기)

“매기, 이 똑똑한 여자 같으니라고! 당신의 도전정신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카메론)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주겠대.” (매기)

“애들을 뉴욕에 데려갈 순 없어.” (카메론)

“당연하지. 나 혼자 살 방 얻기도 빠듯한데.” (매기)

“그럼 애들은 어떡해?” (카메론)

 

매기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여름 학기까지 해서 18개월 안에 학위를 마칠게. 제니네 엄마가 작은 방을 세 줄 수 있대. 내가 뉴욕에 가면 당신이 여기 와서 애들을 돌보는 거야.” (매기)

“내가?” (카메론)

“그래, 당신이.” (매기)

“응. 당신도 애들도 서로 그리워했잖아. 난 18개월 안에 MBA 학위를 따고 보스턴에 취직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게.” (매기)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카메론)

“당신 주치의한테도 물어봤는데…” (매기)

“삶의 목적이 있는 건 좋은 일이겠지.” (담배를 꺼내 무는 카메론)

“당신한텐 그런 일상이 필요하다고 했어.” (매기)

“그래, 일상이라면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매일 아침 등교시키고 밤마다 재우고 이 닦고 머리 빗으라고 하루 두 번씩 잔소리하고 빨래도 하고…맙소사, 엄청나잖아.” (카메론)

“물론 힘들겠지만 우린 점점 더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어. 이대로 두고 볼 순 없잖아. 내 말 알겠어?” (매기)

“그래, 맞아. 애들이 옮긴 학교는 꼭 소년원 같더라.” (카메론)

“형편없는 곳이야. 우린 좋은 학교에서 피아노 교습도 받았고….” (매기)

“난 교습 안 받았어.” (카메론)

“그래도 펜싱은 배웠잖아. 스키랑 체스도.” (매기)

“다 가족들한테 배웠지.” (카메론)

“내 말의 요점은 우리 애들도 당신이나 나처럼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매기)

“나도 그러고 싶지만 18개월을 어떻게 버텨?” (카메론)

“자긴 할 수 있어. 내가 주말마다 와서 도와줄게.” (매기)

“주말마다?” (카메론)

“그래.”(매기)

“여기서 같이 지낼 거야?”(카메론)

“당연하지.”(매기)

“그럼 다시 가족이 되는 거야?”(카메론)

“맞아.”(매기)

 

보호시설에 들어가기 전처럼 다시 가족이 될 수 있단 얘기에 카메론의 마음이 움직였고, 매기는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을 만났다.

“우리 아들을 대신해서 내가 반대해야겠구나. 저 앤 준비가 안 됐어.” (시어머니)

“카메론은 할 수 있어요.” (매기)

“의사도 저한텐 더 많은 책임이 필요하대요.” (카메론)

카메론은 아내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남자가 뭐하러 그런 책임을 져?” (시아버지)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부담이야.” (시어머니)

“주치의 상담도 했어요. 카메론 상태가 호전돼서 얼마든지 가능하대요.” (매기)

“혹시 이게 다 페미니즘 때문이냐?” (시아버지)

“저흰 빈곤층이에요. 애들은 질 나쁜 학교에 다니고요.” (매기)

“일류학교에 보내봤자 남는 것도 없던데.” (시아버지)

아버지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카메론. 카메론도 일류학교 출신이었다. 비록 중도에 하차했지만.

“우리 애들은 다 착해요.” (시어머니)

“그야 그렇지만 제 앞가림도 못 하잖아.” (시아버지)

“머레이는 다르죠. 우리도 그렇고요.” (시어머니)

 

카메론은 다시 한 번 매기 편을 들었다.

“매기가 하는 일은 칭찬받아 마땅해요.”(카메론)

“물론 아주 기특하지.” (시아버지)

“얘야, 난 절대 반대다. 가족을 두고 가지 마라.” (시어머니)

 

매기는 시어머니에게 단호하게 뜻을 밝혔다.

“어머님, 전 절박해요. 우린 빈털터리예요.” (매기)

 

엄마가 혼자 떠난다는 사실에 토라져 있는 아이들을 어렵게 뒤로 하고 뉴욕으로 간 매기.

 

카메론은 의기소침해 있는 아이들을 과거에 증조할머니가 자랐던 대저택으로 데려갔다.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이 동네 최고의 저택이야. 너희 고조할아버지는 철도 사업으로 보스턴 최고의 갑부였어.” (카메론)

“그런데 왜 우린 가난해요?” (아멜리아)

“재산이 전부 신탁으로 넘어가서 아무도 손대지 못해. 증조할머니가 관리하시거든. 언제 누구한테 줄지 그분이 다 결정하는 거야. 설명하긴 좀 힘들어. 들어가서 구경할까?” (아멜리아)

“남의 집에 함부로 찾아가면 안 돼요.” (아멜리아)

“여긴 보스턴이야. 두 팔 벌려 환영할걸. 고조할머니는 여기서 영국 국왕 내외에게 식사를 대접하셨는데…….” (카메론)

카메론은 자신만만하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주인이 출타 중인 대저택에 들어가 구경했지만, 결국 돌아온 주인에게 곧바로 쫓겨나고 말았다.

 

“창피해 죽을 뻔 했다구요.” (아멜리아)

“창피할 짓은 그 사람이 했어.” (카메론)

“아니에요. 아빠가 창피해요.” (아멜리아 & 페이스)

“난 창피하지 않아. 그 녀석이 문제지.” (카메론)

“아빠가 문제예요.” (아멜리아 & 페이스)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집에 와요.” (아멜리아)

“12일 후에 갈게.” (매기)

“지금 오면 좋겠어요.” (아멜리아)

“너희가 적응하는데 힘들 거란 건 알아. 이번 주엔 오리엔테이션이랑 수강 신청 때문에 못 가고, 다음 주엔 꼭 갈게.” (매기)

 

엄마 없이 아빠와 아이들만의 생활이 시작됐다.

“아빠! 아빠! 빨리 일어나요! 우리 늦잠 잤어요.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페이스)

 

헐레벌떡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자마자 만난 아내 매기의 친구. 다정하게 인사하면서 카메론에게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호한 뼈 있는 한마디를 건넸다.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네요. 이렇게 아내를 도와준다니 생각이 깨인 분이세요. 보통 남편들은 아내가 가장이 되는 걸 방해하죠.” (매기의 친구)

 

아이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끝날 때 데리러 올까? 늦지 않게 데리러 올게.” 했지만, 아이들은 문도 잘 안 열리는 똥차가 창피해 “아니요. 싫어요.”를 외쳤다.

 

그리고, 카메론은 약속과는 달리 엔진이 고장 난 똥차를 수리하느라 하교길에 데리러 가지 못했다. “이런 젠장! 엔진만 고치면 멕시코까지 드라이브 가자.” (카메론)

 

걸어서 하교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이웃집 루스 할머니. 카메론은 정답게 인사하려 하지만 막내 딸 페이스가 말렸다.

“아빠는 말이 너무 많아요.” (페이스)

“난 그저 이웃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는 거야.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 거라고. 친절하게 굴면 누구나 다 좋아해.” (카메론)

 

그리곤 루스 할머니에게 곧장 다가가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바리바리 집까지 들어다 주었고, 할머니가 사양하는 데도 “정리하는 것도 도와 드릴까요? 전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책상이나 다른 가구를 옮길 건 없나요? 가구 배치를 바꾸면 새로운 기분이 들죠... 양파 썰어 드릴까요?” 라고 끊임없이 접근을 시도해 결국 또 아이들의 분노를 샀다.

“대체 왜 그래요?” (페이스)

“내가 뭘?” (카메론)

“문전박대 당할 짓을 했잖아요.” (아멜리아)

“난 좋은 이웃으로서 최선을 다한 거야.” (카메론)

“짜증나는 이웃이겠죠.” (페이스)

“이제 다들 아빠를 보면 멀리 도망갈 거에요.” (아멜리아)

“아니. 여기저기서 나를 찾게 될걸. 난 무거운 가구도 기꺼이 옮겨주고, 창고 정리도 해주고, 공항까지 태워다줄 거야. 난 좋은 이웃이니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카메론)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까지 서로 뾰로퉁했던 부녀지간이었지만, 아버지의 화해 시도를 받아주는 딸들.

“이건 아마존으로 가는 노르웨이 증기선에서 배웠던 요리야.” (카메론)

“그게 언젠데요?” (아멜리아)

“하버드에서 쫓겨난 여름이었지.” (카메론)

 

카메론은 아이들이 잠이 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주방에 한가득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와 빨래 더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치겠네!”

 

잠든 아이들을 향해 “얘들아, 몇 시간만 나갔다 올게. 잘 자고 있어. 난 자정 전이나 그 후에 돌아올게. 잘 자라.” 라고 형식적인 독백을 던지고는 휘파람을 불며 술집으로 갔다.

 

술 마시고 춤추고 신나게 일탈을 즐기고 돌아오니 아이들이 잠에서 깨 화가 나 있었다.

“어디 갔었어요? 일어나보니 아빠가 없어서 페이스가 무서워했어요. 엄마 전화나 받아요!” (아멜리아)

“매기, 아무 일도 없어. 다들 무사하다고. 내가 나간다고 했는데 애들이 자고 있었어. 그렇다고 나갈 때마다 깨울 순 없잖아. 잠깐 바람 쐬고 온 거야.” (카멜론)

“아빠가 엉망이란 걸 엄마도 이젠 알겠지?” (아멜리아에게 페이스가)

“완전 취했어.” (아멜리아)

“엄마가 그걸 아는 게 도움이 될까?” (페이스)

“엄마가 한 주 일찍 오겠지.” (아멜리아)

 

다음 날 등교 하는 길에 카메론은 아이들에게 금요일 엄마가 오기 전까지 대청소를 하자고 제안하지만 “아빠 짐 상자나 정리하세요.” “우리 방을 치워달라고 하진 않을게요.”라며 비협조적이었다. “제기랄, 관둬! 더럽게 좋은 하루 돼라! 이런 망할 놈의 똥차!!” 똥차를 몰고 아이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아빠의 모습을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함께 보는 게 창피한 아이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빠 혼자서 집을 말끔히 치워놓았다.

아이들은 놀라고 좋아서 아빠 품에 신나게 안겼다.

“봐줄만 하지?” (카메론)

“멋져요. 진짜 좋아요.” (아멜리아 & 페이스)

 

언제 으르렁댔냐 싶게 아빠와 두 딸들은 사이좋게 노랠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도왔다. 주말에 집으로 돌아온 아내 매기도 깨끗해진 집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며 카메론에게 고마워했다.

“아빠를 처음 봤을 때도 지금이랑 비슷했어요?” (아멜리아)

“재미있고 다정하고 야외 활동도 모르는 게 없었지. 그 땐 다행히 직업도 있었어. 뛰어난 조명기사였지. 하지만 결국 압박감을 이기지 못했어. 난 그 때 조울증이 어떤 건지 몰랐어. 60년대엔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조울증도 별것 아닌 줄만 알았어.” (매기)

“아빠랑 결혼한 걸 후회하겠네요.” (아멜리아)

“아니, 그런 적 없어.” (매기)

 

하지만 짧은 주말이 끝나고 학업을 위해 매기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고, 카메론도 다시 익숙한 무질서의 세계로 돌아갔다. 거실 가득 어질러놓은 물건 더미마다 <작업중 헝클어 놓지 말기>,<수리 중 그대로 두시오>,<접착제 말리는 중 만지지 마시오> 등의 쪽지를 붙여 놓았고 아수라장이 됐다. 아이들도 아빠를 그대로 흉내내 자기만의 영역에 <또 놀 거니까 그대로 놔두기>라는 메모를 붙여 놓았다.

 

부녀지간의 평화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머리를 빗겨주는 아빠에게 아프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고, 페이스는 설거지 수세미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투덜거리더니 아빠에게 수세미를 냅다 던져버렸다.

 

주말이 돼서 매기가 돌아왔지만 집안은 계속 난장판이었고, 카메론은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매기에게 카메론은 “잠깐 쉬는 중이고 곧 정리할거야. 수세미도 새로 샀어.” “이 아파트의 싱글맘들은 서로 안부도 묻고 같이 커피도 마시면서 나한테는 안부도 안 묻고 커피도 안 줘. 얼마 전엔 자기들끼리 와인이랑 치즈도 먹던데……. 나만 보면 도망가.” 계속 하소연 주렁주렁이었다. 매기는 남편의 하소연을 경청해주고 다정하게 조언했다. “당신이 남자니까 조심스러운 거지. 게다가 애까지 있는 유부남이니까.”

 

한겨울 카메론은 엔진이 고장나 시동이 걸리지 않는 똥차 대신에 뒷좌석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찬바람이 그대로 밀어닥치는 다른 똥차로 바꾸었다.

“저 차는 어떻게 돼요? 사려는 사람도 없을 텐데.” (아멜리아)

아빠에게 버럭 소리지르던 아멜리아가 팔린 차의 추억 때문에 울었다. 여리고 착한 아이!

 

카메론은 상심한 아이들을 부자 증조할머니 댁에 데리고 갔다.

“애들 엄마는 어떠니?” (증조할머니)

“원래 주말마다 오는데 이번 주는 시험이 있어서 못 왔어요. (딸들을 향해) 하지만 우리끼리도 잘 지내고 있지?” (카메론)

“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엄마가 뉴욕에 가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니?” (증조할머니)

“더 많은 기회를 얻으려고 가신 거에요.” (야무지게 대답하는 아멜리아)

“이젠 여자도 뭐든 할 수 있대요.” (페이스)

“참 열심히도 사는구나.” (증조할머니)

“우린 파이터라고 불러요.” (카메론)

“이런 예쁜 애들을 혼자서 돌보다니 정말 자랑스럽구나. 난 요즘 링컨만 타니까 벤틀리는 널 주마.” (증조할머니)

증조할머니는 바닥에 구멍 난 똥차를 대신 할 벤틀리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지만, 카메론은 비싼 차 대신에 다른 제안을 했다.

“저희는 임대주택에 살아요. 전 벤틀리 유지비도 없고 기름 채울 돈도 없어요. 우리 애들은 둘 다 아주 똑똑한데 지금 다니는 학교에선 교육에 한계가 있어요. 진짜 돕고 싶으시면 사립학교에 보내주세요.” (카메론)

카메론은 진심을 다해 호소했지만, 증조할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런 건 여자애들한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안 그러니?” (증조할머니)

 

결국 카메론은 벤틀리를 포기했고,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건방진 말대꾸에도 무시하지 않고 차분히 응대해주는 아빠.

“미안. 너희가 실망한 건 알지만 증조할머니한테 벤틀리를 받을 순 없었어.” (카메론)

“그 차를 팔아서 크레페 수레를 샀으면 우린 가난에서 벗어났을지도 몰라요.” (아멜리아)

“크레페가 아무리 맛있어도 떼돈을 못 벌어. 지금은 불경기니까.” (카메론)

“그럼 벤틀리를 팔아서 현금을 가지면 되죠.” (아멜리아)

“차를 파는 건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 (카메론)

“아빠한테 준댔잖아요.” (아멜리아)

“너희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카메론)

“남들이 부러워하는 걸 우리도 가져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고요.” (페이스)

 

그랬다가도, 주말이 돼 돌아온 엄마에게 금세 아빠 자랑을 하는 딸들.

“아빠가 멋진 일을 했어요.” (아멜리아)

카메론이 학대 받던 개를 구출했고 식구가 됐단다.

카메론은 아멜리아와 페이스에게 위장전입이 불법이니 감옥에 가게 될 거라고 악담을 퍼붓어댔던 이웃 아이들까지 불러서 함께 농구 놀이를 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화해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좋은 애들이던데 언제 한 번 초대하자.” (카메론)

“안돼요. 이런 돼지 우리를 보여주느니 죽겠어요.” (아멜리아 & 페이스)

“나 상처 받았어.” (카메론)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카메론은 저녁 식사 준비하느라 바쁜데 아멜리아는 피아노 치며 노래하느라, 페이스는 춤추느라 바빴다.

“페이스, 그만하고 식탁 좀 치워줄래?” (카메론)

“난 바빠요.” (페이스)

“금방 밥 먹을 거니까 자리를 치워놔야지.” (카메론)

“이따가요.” (페이스)

“지금 당장! 지금 하라고!!” (카메론)

아빠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놀기만 바쁜 두 딸에게 결국 또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카메론은 밀가루가 들어있는 양푼을 냅다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아빤 못됐어요! 난 하인이 아니에요.” (페이스)

“그래, 내가 하인이지. 온종일 요리하고 집 청소하고 차 태워주고 시중들어주니까 내가 하인으로 보이지? 난 나갈 거야.” (카메론)

“보모도 없잖아요.” (아멜리아)

“그딴 거 필요 없어.” (카메론)

“밤에 우리끼리 있으면 페이스가 무서워해요.” (아멜리아)

“담력을 키울 때도 됐어.” (카메론)

“못 가요.”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집을 나가는 아빠의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카메론은 기어히 뿌리치고 나왔다.

“난 나가야겠어. 더는 못 참겠다고. 건방진 꼬마들 말고 어른들을 상대하고 싶어. 그 손 치워.” (카메론)

아멜리아는 동생 페이스와 함께 복도로 나와 씩씩거리며, 나가는 아빠를 계속 바라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빠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자, 둘은 겁먹은 채 방망이를 들고 거실을 지켰다. 하지만 카메론은 두 딸이 걱정돼 외출하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카메론)

“아니에요, 아빠. 우리가 더 용감해질게요.” (아멜리아)

“어서 가서 자. 난 치울 게 산더미야.” (카메론)

 

아이들이 자러 가고, 카메론은 밀가루로 엉망진창이 된 바닥과 벽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부실한 현관문 잠금장치도 손봤다.

 

여름이 됐다. 아이들은 아빠의 시선이 닿을만한 구석구석에 <담배=사망>, <경고문, 흡연은 죽음을 부른다>, <하루 두 갑이면 10년은 먼저 간다>는 그림과 메시지를 담은 쪽지를 열심히 붙였고, 그럼에도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는 카메론의 가슴팍에 <실제 골초의 폐> 쪽지를 붙였다.

“우울해.” (카메론)

“그러시겠죠. 키우던 개는 도망갔고, 부모님은 생활비를 쥐꼬리만큼 주고, 다들 아빠를 피하니까요.”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동생 페이스를 데리고 친구 만나러 가겠다고 하자, 우울한 카메론도 따라 가겠다고 나섰다.

“나도 가도 돼?” (카메론)

“안 돼요.” (아멜리아 & 페이스)

“친구들이랑 놀 거라구요.” (아멜리아)

“그럼 친구들을 여기로 불러.” (카메론)

“이 돼지 우리로요?” (페이스)

“그런 말 하지 마.” (카메론)

“어른이 애들이랑 노는 건 이상해요.” (페이스)

“아빠나 우리나 각자의 생활이 있어야죠.” (아멜리아)

“너희한테 묶여 있는데 내 생활이 어디 있어?” (카메론)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자매 뒤로 멍하니 지켜보며 계속 서 있는 카메론. 카메론의 밤 외출을 막아섰던 아이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알았어요. 공원에 있는 테이블로 와요.” (아멜리아)

아이들은 카드놀이를 했고, 옆에 서 있던 카메론은 습관대로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누구 라이터 없니?” (카메론)

아멜리아는 정색 하며 “너희 집에 가서 놀아도 돼?” 라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카메론은 한술 더 떠 애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차랑 토스트를 먹으면서 보드게임을 하자.” (카메론)

“우린 창피하다고요. 남한테 우리집을 보여주기 싫다고요.” (아멜리아 & 페이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너희 잘못이 아니야. 아빠가 조울증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친구들 앞에서 창피해 하지 마. 제길 관두자.” (카메론)

 

카메론이 화나고 속상해하며 성큼 집으로 가버렸고, 자매는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그렇게나 질색했던 집들이를 하게 됐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런 집은 처음 볼 거야.” (아멜리아)

“더러운 집에 많이 가봤어.”(남자 친구)

“우리 집만큼은 아닐걸.”(아멜리아)

 

“친구들을 데려왔어요.” (아멜리아)

“정말?” (카메론)

기특하고 착한 딸들에게 미소 짓는 카메론.

 

“물건이 왜 이렇게 많아?” (여자친구)

“우리 아빠가 조루증(조울증을 잘못 말함)이거든.” (페이스)

“조울증이야. 기분장애의 하나지.” (아멜리아)

아빠의 충고대로 친구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설명하는 착한 딸들.

“우리 삼촌도 조울증인데 그 집도 여기랑 비슷해.” (남자친구)

 

아이들은 금세 어울려 재밌게 놀면서 카메론이 만든 토스트까지 맛있게 먹었고, 앞장 선 카메론을 따라 숲으로 가서 호신술도 배우고 마음껏 자연 놀이도 즐겼다.

 

가을! 카메론은 매기에게 아이들 자랑을 했다.

“아멜리아는 지난주에 학교 불량배를 손봐줬어. 어찌나 세게 찼는지 목발 신세를 만들었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카메론)

“곧 일자리를 잡아서 돌아오면 더 좋겠네. 지금까지 도와준 거 정말 고마워.” (매기)

 

드디어 컬럼비아대학에서 곧 MBA 과정을 수료하게 된 매기는 교수님 추천서와 함께 면접을 봤다.

“뉴욕의 후튼 증권사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전 하워드사에 꼭 들어오고 싶어요.” (매기)

하지만 면접관들은 매기가 애가 둘이나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밝히자, 더 이상의 면접을 진행하지 않았다.

 

한편, 카메론은 줄담배를 피워가며 밤을 꼬박 새워 페이스의 플라멩고 공연 의상을 페이스의 주문대로 주름도 많고 반짝거리게 만들어냈다. 인형옷을 교본 삼아서 직접 재봉틀 앞에 앉아 맥주캔을 들이키며 뜯어 고친 인내심의 결과에 페이스는 너무 맘에 들어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예쁜 치마예요.” (페이스)

“우리 딸 플라멩고 인어공주 같네.” (카메론)

 

스스로도 뿌듯해 새벽 5시에 아내 매기에게 전화를 건 카메론.

“딸을 위해 나풀거리고 반짝이는 치마를 만들었어.” (카메론)

“멋지네. 이제 잠 좀 자.” (매기)

“난 하나도 안 피곤해.” (카메론)

“딸의 의상을 만들며 밤을 새우는 아빠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카메론)

“리튬은 복용하고 있어?”(매기)

“사실 당신 가고 나서 한 번도 안 먹었어. 맥주를 조금씩 홀짝이면 온종일 끄떡도 없거든.” (카메론)

 

주말이 돼 집으로 온 매기는 카메론이 리튬을 복용하지 않은 걸 걱정하면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자기 몸과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매기)

“당신은 애들한테 책임을 다하고 있어?” (카메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매기)

“당신 힘든 거 알아. 주말마다 내려오느라 그동안 힘들었잖아.” (카메론)

“여기 오는 게 아니라 떠나는 게 힘들어. 다들 나를 최악의 엄마라고 생각해. 애들한테 더 나은 기회를 주려는 것 뿐인데. 당신은 명문가 출신이라 모를 거야. 백인이 가난하게 살면 그냥 특이한 거지만 흑인이 가난하면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아.” (매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날 봐주는 사람도 한 명도 없어. 내 방 하나도 제대로 못 치우거든.” (카메론)

“난 뉴욕에 있는 후튼사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이미 결정했어.” (매기)

“나 혼자 더는 못 버텨. 우린 당신이 필요해.” (카메론)

“나도 알고 있어. 당신은 할 만큼 했어. 이젠 내가 돌볼 차례야.” (매기)

“애들을 뉴욕으로 데려 가겠다고?” (카메론)

“난 아직 당신을 믿고 절대 포기하기 싫지만 어쩔 수가 없어. 원래는 졸업해서 바로 돌아오려고 했어. 직장을 구하고 당신이랑 같이 지낼 수도 있었어. 둘이서 같이 애들을 키우면서 말이야. 그런데 여기선 취직할 수가 없어. 보스턴 회사들은 날 받아주질 않아.” (매기)

“왜 안 받아줘?” (카메론)

“여긴 보스턴이야. 당신 같은 사람만 원하지.” (매기)

 

카메론은 친구까지 찾아가 아내의 일자리를 구해주려고 노력했지만, 매기 말대로 안됐다. 결국 매기와 애들은 뉴욕으로 떠나게 되고, 카메론만 보스턴에 남게 됐다.

“애들이 그리울 거야.” (카메론)

“아빠는 누가 돌봐요?” (아멜리아)

“아빠는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 (매기)

“영화도 보러 다니고, 파티도 다니고, 불장난도 쳐야지.” (카메론)

카메론은 자신을 걱정하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려고 농담을 던졌지만 소용없었다.

“불장난은 위험해요.” (아멜리아)

“우리가 없으면 아빠는 술만 마시고 아무렇게나 살 거에요.” (페이스)

“그렇지 않아.” (매기)

“아빠가 외로울 거에요.” (아멜리아)

“그건 그렇지.” (카메론)

“혼자 너희를 돌보는 건 아빠한테 큰 부담이었어.” (매기)

“아니에요. 같이 드라이브도 다녔고, 뮤지컬 사운드 트랙도 만들어 주셨어요.” (아멜리아 & 페이스)

“아빠한테도 휴식이 필요해.” (매기)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땐 딸기랑 키위를 잘라서 꽃처럼 만들어 줬어요.” (아멜리아)

“내가 그랬지.” (카메론)

다정한 부녀지간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매기.

“너희가 아빠를 보러 놀러 오고 아빠도 놀러 오면 돼. 뉴욕은 멋진 도시니까 너희 맘에 들거야. 약속할게.” (매기)

매기는 아이들을 열심히 설득했지만, 아빠를 두고 떠나야 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젯밤에 페이스가 이런 말을 했어.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아빠가 거기 있어줬대.” (매기)

“그래서 짜증났을 거야.” (카메론)

“다른 계획이 있어. 내가 취직해서 돈을 벌고 애들은 여기서 당신이랑 지내면서 자전거도 타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야. 하지만 반드시 좋은 사립학교에 보내야 해. 그건 포기 못 해.” (매기)

“그럴 수 있겠어?” (카메론)

“뉴욕에 데려가면 컴컴한 집에 갇혀서 애완견처럼 지내겠지. 난 매일 8시에나 퇴근할텐데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우리 아가들인데.” (매기)

“그래, 우리 아가들이야.” (카메론)

매기와 카메론은 서로의 어깨를 들썩이며 펑펑 울었고, 멀리서 줄넘기를 하고 놀던 아이들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1년 후.

아멜리아의 스포츠 경기 연습을 지켜보며 열심히 응원하면서 사진을 찍는 카메론을 보고 아멜리아의 친구가 대뜸 물었다.

“어떻게 네 아빠는 연습 때마다 오셔?”

“다른 할 일이 없거든.” (망설임없이 쿨하게 대답하는 아멜리아)

 

“오늘 애니네 집에 자러 가도 돼요?” (아멜리아)

“전 피피랑 영화관에 가기로 했어요.” (페이스)

카메론은 “배로 강을 건너기에 완벽한 날씨란 말이야.”라며 보트를 빌려놨으니 배 타고 놀자고 했지만, 아이들은 완고했다.

“찰스강이고 뭐고 다 꺼지라고 해.” (카메론)

“찰스강은 사실 못된 놈이래요.” (아멜리아)

 

아쉽지만 미소지으며 포기하는 카메론.

“안녕! 아빠! 사랑해요!” (아멜리아 & 페이스)

“알았어. 아빠랑 엄마는 너희가 자랑스럽단다.” (카메론)

“안녕!” (아멜리아 & 페이스)

“사랑한다!” (카메론)

딸들은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거 하지 마요.” (아멜리아)

“뭘?” (카메론)

“쳐다보는 거요.” (아멜리아)

“그냥 배웅하는 거야.” (카메론)

“하지 마요. 미안하게 만들잖아요.” (페이스)

“미안해 하지 마.” (카메론)

“일부러 불쌍하게 서서 쳐다보는 거 다 알아요.” (페이스)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잘못이야?” (카메론)

“아빠, 우린 이제 돌아보지 않을 거에요. 절대 안 봐요.” (아멜리아)

“누가 돌아보래?” (카메론)

“사랑해요, 잘 가요.” (아멜리아 & 페이스)

 

냉정하게 돌아놓구선 막상은 또 눈물 흘리는 여리고 정많은 아멜리아.

“언니, 울지 마.” (페이스)

“눈물이 멈추질 않아.” (아멜리아)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아빠 카메론. 아멜리아와 페이스는 결국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 아빠를 보았고,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성큼 성큼 달려갔다.

 

♠영화 (인피니틀리 폴라베어)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조울증으로 인해 평범한 사회생활이 어려운 아빠 카메론과, 힘든 남편을 대신해 열심히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성 차별에 인종 차별까지 팽배했던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아내 매기, 그들의 사랑스러운 두 딸 아멜리아와 페이스의 이야기이다.

 

매기는 고단한 외벌이에 가난을 피할 순 없었지만, 아이들의 교육 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책임지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카메론은 조울증 때문에 술과 담배를 끼고 살면서도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 못지 않았다.

 

매기는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남편에게 불평하기보단 오히려 남편을 믿고 감쌌으며, 아이들 역시 평범하지 않은 아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씩씩하게 성장해갔다.

 

만약 매기가 현실이 버거워 남편을 포기했다면, 카메론 역시 조울증에 지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들의 일상과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카메론과 매기는 부부로서 & 부모로서의 길과 책임을 ‘믿음과 사랑’으로 꿋꿋히 헤쳐 나갔기에 아이들 또한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맑고 밝게 당당하고 예쁘게 잘 성장해나갈 수 있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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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개봉, #드라마#코미디#모험

♣감독 : 펠릭스 헤른 그렌

♣출연 : 로베르트 구스타프손/이바르 비크란더/데이비드 비베리/미아 스케링거 등..

 

♠스포일러 있어요~^^

알란은 평생 가장 아꼈던 고양이 몰로토프를 살해한 사악한 여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최후의 만찬이다. 뜨거운 디저트 맛을 보여주마.” (알란)

소시지 덩어리를 묶은 폭탄 다발로 여우를 유인해 복수를 실행했다. 하지만 처절한 복수의 대가로 양로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알란, 우리의 좋은 친구♬

무려 101번째 생일 케이크와 꽃,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알란은 없었다. 창문을 열고 양로원을 유유히 탈출했다.

 

알란은 느린 걸음으로 말코핑 역으로 갔고, 매표소 직원에게 “그냥 아무 버스나 타겠소. 제일 빠른 걸로 주시오.”라고 해서 스트랜그나스 행 버스를 타려 했으나 가진 돈이 모자라 비링거 행을 선택했다.

“비링거엔 뭐가 있소?”(알란)

“아무 것도 없죠.”(매표소 직원)

“그럼, 거기로 주시오.”(알란)

 

표를 받고 나서려는데, 웬 험상궂은 폭주족 젊은이가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비좁으니까 포기하고는 다짜고짜 알란에게 가방을 잠시 맡겼다. 하지만 곧이어 버스가 도착했고 알란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젊은이의 가방을 끌고 버스를 탔다.

“어디로 튄 거야, 이 놈의 영감탱이!” (젊은이)

 

비링거 역에 딱 한 채 있는 집에 사는 줄리어스가 어디 가느냐고 묻자, 알란은 “글쎄, 발길 닿는 대로.”라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집 나온 지 꽤 되셨네. 가방이 엄청 크잖소.” (줄리어스)

“내 거 아냐. 어쩌다 들고 온 거지.” (알란)

남의 가방을 들고 왔으면서도 별 일 아닌 듯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자연스럽고 쿨하게 대답하는 알란.

“늘그막에 손버릇이.” (줄리어스)

알란과 비슷한 연배인 줄리어스는 말은 그렇게 해놓고서도 알란이 배고픈지를 챙겼다.

“그것보다는 목이 말라.” (알란)

“한 잔 하고 가시오.” (줄리어스)

줄리어스는 알란을 선뜻 집안으로 초대했고 음식과 술을 나누며 대화꽃을 피웠다.

“나도 양로원은 정말 싫은데 이번 가을에 가게 생겼소. 전에 일 때문에 가보고 정 떨어졌지. 코가 삐뚫어지게 마셔 봅시다! 그게 사람 사는 거요? 감옥이 낫지. 그러니 형님, 축하합니다!” (줄리어스)

“맞아, 나 자유인이지?! 건배!” (알란)

 

한편 알란에게 가방을 놓친 폭주족 젊은이는 말코핑 역 매표소 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위협해 알란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양로원에선 갑자기 사라진 알란을 찾느라 발칵 뒤집혔고 경찰까지 출동했다. 아론슨 형사는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해 알란의 실종 소식을 알렸는데 말코핑 역에서 폭주족에게 납치당한 걸로 오해하고 있었다. “100세 노인 보신 분, 경찰에 제보 바랍니다.” (아론슨 형사)

 

사실 폭주족 젊은이의 여행 가방 속엔 조직 우두머리의 검은 돈다발이 가득 차 있었다. 알란과 줄리어스는 함께 동행길에 나서 우연히 청년 베니의 차를 얻어 타게 됐는데 베니가 알바를 하면서 이것 저것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있지만 정작 진로 때문에 걱정이라고 하소연하자, 알란은 “배우는 게 남는 거지. 치매 오기 전에 열심히 해.”라고 시크하게 조언했다.

 

주유소 휴게소에서 ‘100세 노인, 폭주족에게 납치 당함’ 이라는 알림판을 본 베니는 폭주족 조끼를 입고 있는 줄리어스를 의심했다.

“그 조끼는 줄리어스 거 아냐. 빡빡이 깡패가 입던 거라고.” (알란)

“노인 조직 범죄단이에요?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거에요?” (베니)

“베니, 알바 치우고 우리랑 같이 가자고!” (알란)

“돈도 공평하게 나누고...” (줄리어스)

“근데 이 돈은 원래 누구 거죠? 분명 주인이 있을 거잖아요.” (베니)

 

알란과 줄리어스, 베니까지 일행이 돼서 호숫가 오두막에서 묵게 됐다.

“길을 잃었어요. 하룻밤만 부탁해요.” (베니)

“방법을 생각해보죠.” (오두막 주인 구닐라)

 

구닐라는 커다란 코끼리 소냐를 키우고 있었다. 서커스에서 학대 받고 있던 코끼리였다.

“친구가 또 생겼네.” (알란)

“누구도 동물을 소유할 수 없어요.” (구닐라)

 

베니는 구닐라에게 18년간 무려 920학점을 땄다고 털어놓았다.

“외계인이군.” (구닐라)

“알고 싶은 게 많아서 나도 미치겠어요.” (베니)

“가장 좋은 거 하나만 골라요. 수만 가지 찔끔대면 결국 남는 게 없다구요.” (구닐라)

“가능한 분석이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죠.” (베니)

 

마침 그 때 두 사람 앞에 구닐라의 전 남친 리키가 나타났는데, 구닐라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던 꽃무늬 그릇을 가지러 왔단다. 구닐라는 리키 앞에서 베니와 교제하는 척 했다.

“살다 살다 너 같은 찌질이 처음 본다.” (구닐라)

 

리키가 떠나고 구닐라는 (920학점을 땄다는 만능인) 베니에게 하소연했다.

“나에겐 왜 늘 양아치만 꼬이는지 상담이라도 받고 싶다니까요. 혹시 ‘거의’ 정신과 의사세요?” (구닐라)

“전문적인 건 몰라도 입문서는 다 읽었죠. 신경심리학만 안했는데 그건 몰라도 돼요. 건강하지 않은 연애를 하는 이유는 복잡한데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 봐요.” (베니)

“베니, 사랑할 땐 그런 게 눈에 안 보이죠!” (구닐라)

“그건 맞네요, 슬프다.” (베니)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법! 그러니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방법은 없다. 얼떨결에 구닐라와 기억상실증에 걸린 폭주족 일원까지 한 팀이 돼 버렸다.

 

알란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전화했던 알렉(친구 유리 포포프의 아들)이 사정 얘기를 듣고 본인의 비행기로 도움을 주었다. 알렉의 큰 비행기 덕분에 구닐라의 코끼리까지 포함해 알란 일행 모두 무사히 발리 섬에 도피할 수 있었다.

“발리 참 아름답다!” (알란)

 

알란은 구닐라와 서로 호감을 느끼면서도 고민하며 주저하는 베니를 보고 조언했다.

“신중하게 분석한 후 행동해야 돼서......” (베니)

“소중한 걸 버릴 셈인가? 너희 둘이 느끼는 그 감정...큰 행운이라고. 어서 가서 고백해. 자넨 쉬운 걸 어렵게 하는 게 문제야. 어서 가!” (알란)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알란)

 

알란의 지난 인생 역경 속으로!!

알란이 겨우 열 살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일찍 돌아가셨다. 임종 전 어머니 곁에서 앞으로 고아 처지가 걱정된 알란이 “난 어떻게 살아?”라고 한탄하자, 어머니는 “너무 걱정하지 마. 아빠는 생각만 많아서 사는 게 힘들었잖니. 괜히 고민해봤자 도움 안 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세상은 살아가게 돼 있어.”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그리고 그게 알란의 인생관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폭탄 터뜨리는 걸 좋아했던 알란. 덕분에 위험 인물로 간주돼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몇 년을 감금당했다가 생물학자 룬드버그 교수를 만났고 이상한(?) 수술을 받았다.

“알란, 혹시 조상 중에 검둥이가 있니? 그 폭력 성향은 흑인 피에만 있거든.”(인종차별주의자 룬드버그 교수)

“백인에게 흑인 조상 그거 재밌겠어요!” (알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손을 써야겠군.” (룬드버그 교수)

“나 닮은 자식은 못 낳게 하는 거란다. 더러운 유전자는 씨를 말려야 한다나. 별 탈 없기만을 믿어야지 어쩌겠나.” (알란)

 

수전증 있는 룬드버그 교수가 손 떨면서 수술한 부작용으로(?) 아랫배가 아파서 중간에 쉬어가려 들른 곳은 무기 공장이었다.

“일합시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스페인 출신 동료 에스테반)

“난 폭탄 편이야. 다 터뜨리고 싶다고.” (알란)

정치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폭탄을 좋아했던 알란은 자연스럽게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 원없이 폭탄을 터뜨렸다. “내 전성기였지.” (알란)

 

그리고 좋은 것도 잠깐이라고 폭탄 터뜨리는 게 시들해지자, 다른 재밌는 걸 찾으려고 길을 떠났다. 도중에 우연히 프랑코 장군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 돼 우정의 표시로 그가 가장 아끼는 총 한 자루도 선물 받았다.

 

이후에 그 권총과 미국 노동 허가증을 교환했고, 지구 최고의 폭탄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플루토늄 핵무기 프로젝트)에 참여해 그만의 폭파 전공을 살려 톡톡히 한몫을 해냈다.

“죽을 때까지 술은 내가 사겠소. 당신은 인류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겁니다. 당신의 업적은 역사를 바꾸었고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의 발명품으로 인류의 전쟁도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친구여! 이제 누구도 전쟁을 안 할 겁니다. 폭탄의 엄청난 힘이 두려울 테니까요. 폭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돼요!” (해리 트루먼 미국 부통령)

알란에게 고마워했던 트루먼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대통령이 됐다.

 

알란은 고향 스웨덴 귀국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에어란더 수상의 환영만찬에도 초대됐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극찬하던데, 당신이 미국에 큰 기여를 했다고.”(에어란더 수상)

“기여는 잘 모르겠고 파티는 좀 했어요.” (알란)

“그거 참 궁금하군. 알란, 당신이 했던 일 말이요.”(에어란더 수상)

“총리께서 당신을 원자력연구소에 모시라고 하시는데 학교는 어디 나오셨소?” (보좌관)

“졸업도 못했는데...겨우 3년 다녔거든. 10살 때 관뒀어요. 학교 관두고 나서 10살 때 생일이었거든.”(알란)

 

에어란더 수상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유명 물리학자 유리 포포프도 알란을 찾았다.

“같이 산책이나 할까요? 당신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해 주시죠. 당신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요.” (유리)

“그러죠, 뭐. 근데 왜 내가?” (알란)

“스탈린 동지는 아주 좋은 분이요.” (유리)

“난 그냥 폭탄이 좋은 거요.” (알란)

“나도 폭탄 좋은데.” (유리)

“다이너마이트만 줘. 다 폭파시켜 버릴 거야.” (알란)

 

알란은 유리와 함께 잠수함에 헬기를 타고 러시아로 갔다.

“시베리아 공장에선 핵폭탄이 왜 안 나와? 누구 책임이야? 묻고 있잖아.” (스탈린)

부하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있던 스탈린은 알란을 보자마자 대뜸 요구했다.

“원자폭탄에 대해서 아는 거 다 말해!” (스탈린)

 

딱딱한 분위기 전환도 되고 하니, 일단 스탈린과 술 파티를 벌인 거까진 좋았는데 알란은 그만 술김에 “그만 괴롭혀, 미친 놈아! 프랑코 같은 자식아! 내가 프랑코 생명의 은인이지.” 라고 중얼거렸고, 스탈린은 “파시스트 프랑코? 스페인 쓰레기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그 반동분자의 친구였다고?”하며 분노에 불을 지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스탈린)

안타깝게도 알란은 소련 노동수용소로 끌려가고 말았고, 거기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동생 허버트를 만났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돼 있다니까.” (알란)

허버트가 세탁실에서 훔친 수류탄이 터져 아수라장이 된 덕분에 두 사람은 수용소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수용소랑 태평양 함대가 대형 화재로 다 무너져 버리자, 스탈린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

 

“사람은 오래 겪고 볼 일이다. 처음과 끝이 다른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알란)

1968년 봄 파리에서 허버트와 그의 아내와 함께 파리 외무부장관 파티에 초대 받았는데 러시아에서 스탈린과 매일 파티를 벌였던 블라디미르가 파리 대사관 통역관으로 변신해 있었다. 얼떨결에 그를 알아본 알란은 미국 CIA에까지 화려한 인맥을 인정받아 러시아의 물리학자 친구인 유리 포포프와 함께 이중 스파이 역할도 하게 됐다.

“근데 첩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기밀이랄 것도 없는 종이 쪼가리 뿐이었으니. 러시아와 미국 모두 쓰레기 정보만 줬거든. 정보가 꼬여 누군가 죽기도 했는데, 냉전시대엔 허구헌 날 그랬다.” (알란)

알란은 친구 유리가 사망하자 이중 스파이를 그만두었지만, 유리의 아들 알렉과는 가끔 만났고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

알렉은 알란 일행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가용 비행기를 동원해 무사히 발리에 도착하게끔 도왔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스웨덴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로 영화로까지 제작돼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인 알란이 마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현대사의 핵심 상황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 대활약을 펼치는 게 황당하면서도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렇게나 화려하게 종횡무진하면서도 알란은 막상 정치, 권력, 이념, 인종차별 등과 같은 우리 시대 어두운 문제들의 무게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 타고난 낙천주의자 알란은 긴 인생 역경 내내 고난도 모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때 그 때 즐거움을 추구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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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카페>

#1993 #드라마 #코미디

♣감독 : 퍼시 애들론

♣출연 : 마리안 제게브레히트/C.C.H.파운더/잭 팰랜스 등...

 

♠스포일러 있어요~^^

 

영화는 못 봤어도 아마 여기저기서 OST는 들어봤을 수 있다. 그 유명한 ♪Calling You♬

 

♪♬사막을 따라 라스베가스 어딘가로~ 내가 있던 곳보다 나은 어딘가로~ 고장나버린 커피 기계~ 엉망이 되어버린 작은 카페~ 난 널 부르고 있어~ ♪♬

 

온종일 먼지 바람 가득 날리는 황량한 사막에 자리잡고 있는 낡고 초라한 ‘바그다드 카페’. 명색이 카페인데 노랫말처럼 커피머신은 고장난 지 오래돼서 커피를 못 팔고 있고, 손님이라곤 고작 사막을 지나치는 길에 들른 트럭 운전사들 정도일 뿐이다.

 

카페 주인인 브렌다는 파리 날리는 가게 운영에,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과 하루종일 피아노만 치는 어린 미혼부 아들과 울고 보채는 갓난 아기인 손자, 한껏 꾸미고 외출해서 놀기만 바쁜 철부지 딸까지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에 그야말로 지치고 찌들었다.

 

브렌다는 길가에 버려져 있던 커다란 보온병을 주워 온 남편에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장난감이 아니라 커피 기계가 필요하다고!” (브렌다)

 

절박하게 악쓰는 아내를 달래진 못할망정 남편은 오히려 “계속 그렇게 박박 긁어대면 나 떠날 거야.”하면서 정말 떠나버렸다.

 

“돌아오지 마. 우는 것도 아까워.” 해놓고 막상 울고 있는 브렌다 앞에 저 멀리 도로 건너편에서부터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풍만한 몸매의 낯선 그녀가 나타났다. 먼 독일에서 미국까지 여행 와서 남편에게 매몰차게 버림받고 혼자가 된 야스민이었다. 무거운 짐가방을 이끌고 한참을 걸어온 야스민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눈물을 닦고 있는 브렌다에게 물었다. “모텔이 어디에요?” (야스민)

 

카페 바로 옆에 있는 모텔 역시 브렌다가 관리하고 있었지만, 카페 못지 않게 허름하고 낡아빠진 모텔에 진짜 묵을 생각이 있는지 거듭 확인에 나섰다.

“진심이에요? 택시 안 불러도 돼요? 언제까지 묵을 건데요?” (브렌다)

 

야스민이 여행자 수표로 결제하고 키를 받아 룸에 들어서보니 천정 벽지가 뜯어져 있고 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아 있다.

 

짐을 대충 정리해두고 카페에 들어서 커피를 주문해보니 웨이터 카후엔가는 무심하게 커피 기계가 없다며 커다란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따라 주었다. 사실 그 보온병은 야스민의 것으로 남편이 야스민과 함께 매몰차게 길가에 버린 것이었지만 그녀는 짐짓 모른 체 했다.

 

브렌다는 갓난 아기를 의자에 묶어둔 채 피아노만 치는 아들에게 악을 쓰며 야스민의 룸을 청소하러 갔는데 방안에 온통 남자 옷과 물건뿐인 걸 보고 수상하단 생각에 바로 보안관을 호출했다.

“남자 옷으로 가득 찬 가방에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수상하잖아요.” (브렌다)

“뭘 입든 자기 취향이죠. 여권도 여행 티켓도 아무 문제 없는데요.” (보안관)

 

보안관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거두지 못한 브렌다는 야스민이 계속 머물겠다는 걸 마땅찮아 했다. 하지만 불친절한 브렌다와는 달리 야스민은 고객이면서 자신의 방을 직접 대청소하는가 하면, 웨이터 카후엔가에게서 브렌다의 남편이 떠나버렸다는 얘길 전해 듣고 손수 카페 운영에 필수인 장보기 목록을 메모해주고, 브렌다가 장보러 간 사이에 온갖 잡동사니로 어지럽고 지저분했던 사무실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고, 칭얼대는 갓난 손자까지 능숙하게 안아 돌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브렌다는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총까지 들고 와 야스민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사무실 누가 건드렸냐고!” (브렌다)

“나는 좋아할 줄 알았어요. 행복해할 줄 알았어요. 편하게 일하면 좋잖아요.” (야스민)

“모텔 손님이 내 행복을 신경 써요? 무슨 헛소리! 그 따위 말 안 믿어요. 난 절대 못 믿어요. 누가 그러라고 허락했어요? 누가 그 쪽더러 신경쓰래요? 무슨 상관이에요? 원래 있던 상태로 전부 원상복귀 시켜요, 하나도 빠짐없이.” (브렌다)

 

그 무안을 당하고도 야스민은 계속 모텔에 머무르면서 카페를 찾았다. 그리고 몰래 자신의 자켓을 입고 있다가 들킨 브렌다의 딸 필리스와 오히려 마음껏 패션쇼 놀이를 즐겼고, 엄마에게 타박만 당하는 아들 살라모에게 피아노 연주를 계속하라고 격려하며, 살라모의 갓난 아들까지 능숙하게 보듬었다.

 

브렌다는 딸과 아들, 손자까지 야스민의 룸에 모여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또 불같이 화를 냈다.

“이대론 못 살겠어요. 더는 못 참아요. 당신이 뭔데 이래요? 무슨 속셈이에요? 누구 맘대로 내 삶을 휘젓어요? 여기서 나가요. 얼른 짐 챙겨 나가요. 가서 당신 애랑 놀아요.” (브렌다)

 

야스민은 그렇게나 까칠한 브렌다에게 덤덤하게 고백했다. “난 애가 없어요.” (야스민)

 

야스민의 아픈 고백에도 잠시 움찔했을 뿐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던 브렌다는 금세 다시 돌아왔고 비로소 달라졌다.

“저기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일도 많고 애들도 돌봐야 하니까요. 남편이 일주일 전에 떠났거든요.” (브렌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게 되면서 팍팍한 현실에 우악스럽기만 했던 브렌다 마음의 문이 비로소 부드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오후에요, 야스민.” (브렌다)

“좋은 오후에요, 브렌다.” (야스민)

 

야스민은 카페에서 브렌다를 도와 손님들에게 서빙을 했고, 독학으로 익힌 마술을 곁들여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주변을 편안하고 즐겁게 만들면서 자신도 즐거워하는 야스민의 포근한 아우라에 매력을 느낀 화가 콕스의 초상화 모델도 열심이었다.

 

“브렌다 카페 가 봤어? 마술쇼를 하는데 라스베가스보다 잘해. 거기 가서 커피 한 잔 하지.”

트럭 운전사들의 홍보까지 힘입어 어느새 바그다드 카페는 손님들로 북적였고, 브렌다는 야스민에게 배워 함께 마술쇼를 하며 흥겨운 분위기를 북돋우는데 한몫 했다. 카페도 브렌다도 야스민과 함께 하면서 놀랍게 달라졌다.

 

그러나, 보안관이 찾아와 안타깝게도 야스민에게 나쁜 소식을 전했다.

“지금쯤 독일로 돌아간 줄 알았습니다. 여기서 일해요? 그럼 영주권이 필요합니다. 여행 비자도 만료됐고, 죄송하지만 신고해야겠어요.” (보안관)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야스민은 하는 수 없이 짐을 챙겨 불현듯 떠나게 됐다. 브렌다는 택시를 타고 떠나는 야스민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잘 있어요, 브렌다.” (야스민)

“잘 가요, 야스민.” (브렌다)

 

야스민이 떠나면서 카페의 특별한 활력소였던 마술도 사라졌고, 다시 예전처럼 우중충하고 썰렁한 분위기로 빠르게 돌아갔다. 다시 미소 잃은 공허한 눈빛으로 돌아간 브렌다는 창밖만 우두커니 바라보았다가 우편함을 뒤졌다가 했다. 화가 콕스는 완성된 야스민의 초상화 액자를 카페 안에 걸어두고, 꽃병도 놓았다. 모두들 야스민을 그리워했다.

 

어느 날 전화벨 소리에 황급히 달려가는 브렌다.

“나 브렌다예요. 어디에요?” (브렌다)

 

제대로 된 응답 없이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저 멀리서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돌아오는 야스민을 본 브렌다의 얼굴에 다시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두 사람은 정답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고, 필리스와 살라모, 갓난 아기까지 반갑게 마중나왔다.

 

바그다드 카페엔 “마술! 마술! 마술!”을 연호하는 손님들로 다시 북적였고, 살라모의 멋진 피아노 연주에 야스민과 브렌다는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쿵짝 쿵짝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마술을 즐기는 파티가 신나게 펼쳐졌다.

 

♪♬다들 잘 있었나요? 나도 이곳 모하비 사막에 살고 싶네. 편하고 느린 삶 끌리지 않아? 시작해봐요. 오늘을 사는 거에요. 바그다드 카페에서 쇼가 시작됐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요. 삶이 아름다워질 테니까. ♪♬

 

손님들 속에 몰래 섞여 있던 브렌다의 남편. 그는 사실 브렌다를 떠나지 않고 가까이에서 계속 걱정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브렌다는 남편에게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포옹을 했다.

 

화가 콕스는 꽃을 들고 야스민을 찾았다.

“제가 당신에게 결혼해달라고 하면…그리고 (당신이) 승낙하면…(떠나지 않고) 영원히 있을 수 있어요. 결혼해 주겠소, 야스민?” (콕스)

 

야스민은 미소로 답했다. “브렌다랑 상의해볼게요.” (야스민)

 

포근하고 다정하고 착한 심성의 야스민이 황량한 사막 풍경에 훈훈한 온기와 살맛나는 힘을 불어넣었다. 선한 영향력의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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