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생이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 과제의 일환으로 미국 남서부에 위치한 나바호족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일 년을 보냈다.
원주민 집단을 관찰하고 연구 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한 인디언 가족과 함께 지냈다. 그들의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과 함께 일하며 나바호족 인디언의 전반적인 삶을 공유했다.
그 가족 중 할머니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친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이해라는 공통의 언어를 서로 나눈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다시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부족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그 젊은 여성과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부족 사람들 모두 그녀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그녀가 픽업트럭에 올라타고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할머니가 따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의 풍파로 거칠어진 주름진 손을 여학생의 뺨에 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I like me best when I’m with you.)
두 사람의 관계가 부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살아온 과정과 삶의 방식이 달라도 나의 존재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그런 관계가.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관계.
그 대학생은 아마도 처음에는 학술 연구자의 냉정한 자세로 원주민의 생활방식을 조사하기 위해 그곳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벽을 넘어 부족 사람들은 그녀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였고, 그녀 역시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사랑, 이해, 공감의 공통점은 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가슴, 그래서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 주는 마음이다. 그때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친교를 넘어 영적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누는 것. 판단보다는 온 마음을 담아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어떤 사상과 지식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런 행운을 가졌는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뉴욕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린 오찬 자리에 지각했다. 친구들이 걱정하고 있는데, 루빈스타인이 그보다 무척 어려 보이는 매혹적인 금발 여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그는 인색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날은 값비싼 요리와 고급 포도주를 아낌없이 주문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음식 값을 지불했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모두 놀란 것을 나도 아네. 실은 오늘 아침에 내가 유언장을 준비하려고 공증인을 찾아갔다네. 딸과 친척들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기고, 자선단체에 기부도 많이 하기로 했지. 그런데 그 유언장 속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어. 전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내용이었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좀 더 후하게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네.”